나중에, 다음에
최원현/
nulsaem@hanmail.net
누가 저토록 고운 색감을 입혀 놓았을까.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부신 황금빛 가을이 한 폭 그림으로 불타고 있다. 아름답다고 아무리 감탄을 해도 다 표현되지 않아 나의 표현력 한계만 나무랄 판이다. 그런데 그런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고 놀라워할 만큼 지금 내 마음은 편치 못하다. 이 아름다운 가을 같은 나이에 떠나버린 그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k작가가 밤새 세상을 떴단다. 아픈 데도 없었고 갑자기 죽음에 이를 어떤 이유나 증상도 없었단다. 그런데 지난 밤 잠자리에 든 지 얼마 후 가슴이 답답하다 하더니 그대로 숨이 멎어버렸다고 한다. 시를 쓰고 동화를 쓰던 그, 그래선지 늘 천진함이 묻어나던 그는 제주가 많아 컴퓨터도 잘 했고 노래도 잘 했고 놀기도 잘 했다. 그런 그가, 누구보다 건강하던 그가 밤새 안녕이 되어버린 것이다. 계절로 치면 초가을쯤으로 충분히 인생의 가을을 느끼고 즐길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 했는데 말이다.
며칠 전 통화 때도 그랬다. “언제 술 한 잔 해요!” 내가 술을 안 하는 걸 알면서도 그는 꼭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주는 어때요?” 했다. 그러면 나는 순간 머릿속 수첩의 일정들을 바삐 훑어가며 “이번 주는 안 되겠는데” 했고 그러면 그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럼 나중에 하지 뭐” 했다. 사실 그렇게 ‘나중에’가 된 게 꽤 여러 번이 되었다.
뭐가 그리도 바빴을까. 그런데 이제 그와 나 사이에 ‘나중에’란 존재할 수가 없다. ‘나중에’는 얼마든지 있을 것으로 생각 했다. 그런데 그 ‘나중에’는 내 시간도 기회도, 아니 그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닌 신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난 ‘나중에’란 말을 참 많이도 공수표처럼 날리고 살았던 것 같다. 전혀 책임을 지지 않을 양으로 던져버리던 말이었다. 내 할 일 조차도 ‘나중에 하지’ 하며 미루기가 예사였고, 아내가 모처럼 여행을 가자는데도 ‘나중에’로 미뤘다. 부담스럽거나 귀찮을만한 것은 다 ‘나중에’를 붙여 모면하곤 했다.
샛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면서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가지에 붙은 잎들은 잘 가라고 손을 흔드는 것 같고 떨어지는 잎들은 ‘먼저 갈게’ 하는 것 같다. 저런 저들에게도 ‘나중에’가 있었을까. 바람 한 자락만 불어도 손을 놓칠 수밖에 없도록 간신히 붙잡고 있는 저들이 아닌가. 그런 저들에게 ‘나중에’라고 하면 저들은 얼마나 안타깝고 불안할까.
우리 삶에서도 나중에, 다음에 만큼 무책임한 말도 없을 것 같다. ‘있을 때 잘 해’란 노래처럼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이 아닌가. 나중이란 내가 책임질 수도 내 것일 수도 없는 시간이다. 지금 이 순간조차 내 다음 사람들이 살아갈 시간을 잠시 빌려 쓰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k작가가 ‘나중에 하지 뭐’ 했던 것은 ‘너와는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없겠구나’ 하는 체념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단풍이 바람결에 날리고 있다.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나중에 보겠다고 눈을 돌리면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져 버릴 수 있다는 불안함이 가슴을 누른다. 그러고 보면 ‘나중에’란 말만큼 무서운 말도 없을 것 같다. k작가의 ‘나중에’란 말이 슬픔의 덩이로 목을 매이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