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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지 말라


한평생 살아가면서 다툼 없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화해를 해 전보다 더 친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적이 되어 미움을 안고 사는 사람도 있다.

나는 6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누구와 큰 다툼을 한 기억이 없다. 내 잘못으로 상대를 화나게 했다면 빨리 사과를 해야 마음이 편했다. 간 혹 가까이 지내던 이가 말없이 미워할 경우 손해를 보더라도 될 수 있으면 멀리했다. 서로 안보면 얼굴 붉힐 일이 없기에.

그러나 어쩔 수없이 따져야 할 겨우 용기를 내보지만 어려서부터 울기를 잘하는 나는 눈물부터 흘리니 누구와 대적해봤자 상대를 억압할 위인이 못된다. 작은 일에도 마음을 다치기 쉬워 성격이 강한 사람 곁에 있으면 공연히 주눅이 들고, 언제 어디서나 남에게 말 듣지 않으려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자연히 주위 사람들에게 성실함으로 신뢰를 받아 칭찬을 받았다. 나의 그런 점이 때로는 학교를 다닐 때나 사회생활을 할 때 가까운 급우나 동료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어 미움을 샀다.
 
그러다가 시골 외딴집으로 시집와서 가정에 틀어 박혀 지내다보니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 없어 마음고생은 않고 살았다. 백발이 성성해 노후를 보람 있게 보내고 싶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끝은 어쩜 또 이어진단 말인가. 근 1년 간 내 또래와 딱히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사이가 원만치 못해 자나 깨나 속이 상했다.

지난 해 병상에 있을 때이다. 아플 때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의 위로가 큰 힘이 되는데 누구보다도 먼저 나의 아픔을 안 사람이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은 일을 하게 되면서 처음엔 살갑게 지냈다. 그런데 언제가 별것도 아닌 일로 앙칼지게 대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이유를 물어 화를 풀어도 될 일이었지만 늘 서로 의논의 대상이었고 아량이 넓은 사람으로 믿었는데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난 강한 펀치를 가슴에 맞은 듯 몹시 아팠다. 그동안 내게 품었던 불만을 터트린 것 만 같았다. 그 뒤로 나는 마음에 문을 닫게 되었고 그 역시 곁을 주지 않아 서먹해지기 시작했다. 그 골은 점점 깊어져 최근엔 어쩌다 스치면 찬바람만 보내 가슴이 시렸다.

경쟁 사회에서 같은 일을 하다 보니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게다. 미움을 받는 쪽도 힘들지만 미워하는 쪽은 더 괴롭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미움을 내려놓고 화해를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막상 그에게 잘못했다고 빌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나도 모르게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일이 있었을 거라고 믿고 무조건 용서를 비는 마음을 담아 이메일을 보냈다.

우리는 지금 인생의 노을 길을 걷고 있는데 유한한 삶 더 늦기 전에 미운 감정 모두 버리고 예쁜 추억만 남기며 살자고 했다. 그의 답장은 끝내 없었고, 보여주는 모습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폴란드 출생의 미국 영화제작자이자 연출가 인 사뮤엘 골드윈은 ‘적을 만들지 말라’는 글에서 ‘모든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두 옳다고 생각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상대를 내 잣대로만 볼 수 없는 일 아닌가. 또 '인생의 기술 중 90%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나를 먼저 다스려야 할 것 같았다. 그와 다정 했던 일들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옛날처럼 그와 함께 하던 일을 내가 그만 두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황혼에 이르러서 철없는 처사가 아닌가. 만나면 내가 먼저 따뜻한 눈길로 악수를 청해야겠다. 꽁꽁 얼었던 잔설도 훈훈한 봄바람이 어루만지면 녹아내리듯 나도 봄바람이 되어 그의 언 마음을 녹여주고 싶다.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상대를 배려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어떠한 적도 좋은 친구가 되지 않을까.

『복지』2011년 11-12월호 발표 글 <한국한센복지협회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