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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임병문 |
날짜 : 11-06-19 08:53
조회 : 2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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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병 문
내게는 일찍이 한권의 낡은 성경과 오래된 만년필 한 자루가 있었다. 그 책은 인쇄일자가 단기(檀紀)로 찍혀있어 그 묵은 세월을 가늠할 수가 없었고, 그나마 만년필은 군대시절 전우에게 받은 것을 여태껏 간직 하고 있는 것이다.
책은 가죽으로 된 겉표지가 닳아 모서리가 허옇게 들어났고, 만년필은 잉크주머니가 삭아 그것을 갈아 끼우는데 애를 먹었다. 오랜 세월 같이 있다 보니 말 못하는 것과도 풍상을 함께 겪어야했고, 그것은 쌓인 정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을 볼 때마다 단절과 일탈(逸脫)을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선친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대를 이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선친의 삶은 굴곡이 많았다. 흔히 그랬듯 지식인들이 고뇌하고 방황했던 현대사는 참으로 암울했었다. 이념이 다르고 사고가 엇갈리던 그 시대 격변기를 선친은 사셨던 것이다.
내 어릴 적 나는 선친을 따라 가끔씩 어떤 분을 뵙곤하였다. 울창한 대숲에서 싸하고 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어느 고택(古宅)으로 그 어른을 찾아 뵈웠는데, 그 분은 긴 옥고(獄苦)를 두 번씩이나 치른 분이었다. 설야(雪野)라는 호로 불리셨고, 세상과 이념(理念)이 달랐던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 어른이 선친께 주신 것이 바로 지금의 성경책이다. 그때의 말씀은 내 희미한 기억으로는 아마 이랬을 것이다.
“ 내 이제 다시는 감옥 갈 일이 없을 것이네. 자네 이 책을 가지고 가 어려울 때 들춰보시게, 내 이것을 보며 옥고를 견디고 살아 온 것이네.”
선친은 그것을 받아 생전에 소중히 간직하였다. 갖은 풍상 속에서도 그 책은 선친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았다. 한때 설야 어른과 비슷한 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을 때도 그 책은 선친과 함께 하였다.
늦은 밤 홀로 앉아 예의 그 책장을 넘긴다. 소리 없는 갈피마다 두 어른의 자취는 고요히 어리고, 누렇게 빛이 바랜 책장은 변색이 완연하다. 그것은 헤일 수 없이 많은 날 분노와 절망 속에 일탈을 그리워하며 한숨과 눈물로 얼룩진 두 분 옥고의 자취일 것이다. 고린도 전서 13장, 군데군데 밑줄이 눈물겹다.
‘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아내며,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니라,’ 중략
허구헌날 번뇌에 시달리며 그것에 대롱대롱 매달렸을 것이다. 천번만번 그리 매달렸을 것이다. 이념도 사고도 모두가 사람의 일인데, 사람이 어찌 그것으로 하여 이토록 오랜 세월 스스로 고뇌하며 애달퍼야 하는가.
모진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갈피를 넘겨도 갈망은 줄지 않고, 욕구는 가시질 않는다. 육신은 지쳐가고 걸음마다 마음은 무겁다. 어느 날, 비로소 무(無)를 떠올리고 상(相)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대립을 초월한 무한의 경지였던 것이다. 훌훌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험하고 숱한 갈피를 넘기며 나는 어느덧 책의 맨 뒷장에 닿았다. 표지 안쪽에는 신문에서 오려낸 듯한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그 누런 종잇조각에는 옛 시 한 편이 비문처럼 실려 있었다. 옥고를 치르며 설야와 선친이 수없이 보고 뇌었을 그 한편의 시, 매월당(梅月堂)의 작청작우(乍晴乍雨)다. 차마 가슴이 시리다.
‘ 잠간 개었다가 비오고 비오다가 또 개이네 / 천도(天道)도 그러하거늘 세상의 인정이랴 / 나를 칭찬하는 건 나를 헐뜯는 것 / 공명을 마다하면 스스로 공명을 얻네 / 꽃이야 피건 지건 봄이 어찌 다스릴까 / 구름이야 가든 오든 산은 탓하지 않네 / 세상 사람들아 모름지기 알아두어라 / 평생 그 어디서 즐거움을 얻을 것인가.’
비오고 바람 불고 하늘도 그러하거늘, 한낱 인력(人力)으로 어찌 그것을 감당하려 고뇌하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아 그것은 감히 돌이킬 수 없는 세상의 섭리이니, 어서어서 짐 풀고 마음 편히 한 세상 살아감이 어떠하겠는가.
끝내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고뇌했던 생육신(生六臣) 김시습의 무상(無相)어린 교훈이었던 것이다. 이것 때문이었을까. 오랜 영어에서 풀린 설야의 말씀이 희미한 기억 속에 이제껏 새롭다.
“세상 풍파 속에 힘들거든 이것을 들춰 보시게. 그리 마음잡으면 능히 살아남을 것이네.”
그 후 두 어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수를 다하시고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것으로 지혜를 삼았던 까닭일 것이다. 나 또한 세월이 어렵고 생각이 달라 갈등을 겪을 때, 그 성경을 펼쳐보고 두 어른의 자취를 돌아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삶이란 어쩌면 그렇게 비오고 바람 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비개고 바람 자면 한없이 그리운 것 또한 삶이다. 나는 그 삶이 그리우면, 못 견디게 그리우면 편지를 쓴다.
사선(死線)을 넘어 내게로 전해진 그 귀한 만년필에 잉크를 넣고, 옥판지(玉板紙) 곱게 접어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운 이는 내게 낡은 성경이고, 전우(戰友)가 준 만년필이고, 눈물겹도록 사랑하는 그 모든 이다. 나는 언제나 그 편지의 첫머리를 이렇게 적는다.
‘ 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하나니 받느니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고, 생각하기보다 그리워함이 더 행복하나니라. 나는 오늘도 그리운 이 당신에게 편지를 쓰노니, 나는 당신이 있어 참으로 행복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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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1-06-19 1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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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생님께 그와 같은 시대적 상황이 배경으로 남아있을 줄 몰랐습니다. 당시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이념적 갈등이 선친의 삶을 통해서도 충분히 읽혀집니다. 아직 기억속에 또렸이 남아있을 임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그로 인하여 더욱 성숙해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게됩니다. 성경책과 만년필, 대를 이어 남겨야할 귀한 유산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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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6-20 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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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선생님,
더위에 어찌 지내십니까. 뵈우니 반갑습니다. 그날 서로가 조금만 여건이 되었어도, 낯선 거리 그 정겨운 시골버스 터미널에서 어디 국밥집이라도 들어가 탁배기 한 사발에 목이라도 추기고 헤어졌더라면 덜 섭섭했을 터인데....,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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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1-06-19 2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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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생님 글은 어떻게 , 그렇게 맛깔스러울 수가 있는지... 재주가 탁월하십니다. 내가 글 쓰기가 싫어 집니다. 6월27일 느림회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시간을 쪼개어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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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6-20 0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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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
말씀 감사합니다. 사모님도 안녕하시고요. 제게는 없는 그 아름다운 뜨락을 선생님은 가지셨으니 정말 행복한 분이십니다. 하옵고 선생님의 유익하고 재미있는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건강,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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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1-06-19 2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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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문 선생님, 저에게는 아버지가 쓰신 책 한 권과 모자가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의 성경과 만년필이 그런 사연을 담고 있다니 깊이 공감이 됩니다.
눈물겹도록 사랑하는 이에게 쓴 편지가 바로 선생님의 감성 넘치는 수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동이 있는 글, 가슴으로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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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6-20 0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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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화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처럼 뭔가 여운이 남는 글, 작품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글 써보려 노력하지만 항시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나마 지켜보시는 분, 이렇게 말씀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으로 큰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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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1-06-20 0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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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작가님은 그래도 고난의 시기나마 지식인의 아버지를 모셨다는 것을 저는 부러워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고난의 시절 생존을 염려하며 살아야 할 정도로 학벌도 재산도 전혀 없이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님을 곱게 모시려고 무리를 해서 멋진 석물을 해 드렸는데 지난 5월 이장을 하였습니다. 30년이 지나니 자식들이 찾아 뵙는 것이 소홀해서 교통이 편한 종중 산에 모신 것이지요. 언제 그 '이장'에 관한 글을 쓸까 합니다.
부모님을 기억할 수 있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신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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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1-06-20 0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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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작가님은 그래도 고난의 시기나마 지식인의 아버지를 모셨다는 것을 저는 부러워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고난의 시절 생존을 염려하며 살아야 할 정도로 학벌도 재산도 전혀 없이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님을 곱게 모시려고 무리를 해서 멋진 석물을 해 드렸는데 지난 5월 이장을 하였습니다. 30년이 지나니 자식들이 찾아 뵙는 것이 소홀해서 교통이 편한 종중 산에 모신 것이지요. 언제 그 '이장'에 관한 글을 쓸까 합니다.
부모님을 기억할 수 있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신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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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6-21 0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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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선생님,
바쁘신 중에도 읽어주시고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신 분들에게는 언제나 미련과 여운이 남지요. 더구나 저희 세대에서는 더욱이요.
말씀하신 '이장'에 관한 글을 쓰신다면 토속적인 의미도 크겠거니와, 그 시대를 모르는 젊은이들에게도 좋은 글이 되리라 생각이 됩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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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1-06-20 2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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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단지 오래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선대인과 전우의 사연이 배어있고 심장한 역사가 새겨진 선생님의 성경과 만년필은
그대로 생의 일부가 되어 세월이 갈수록 더욱 그리운 사랑으로 메아리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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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6-21 0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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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님,
그동안 어찌 지내셨는지요. 그쪽은 아마 시원한 바다 바람으로하여 서울보다는 한결 나았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난번 뵌 이후, 선생님의 좋은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졸작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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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6-21 1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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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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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6-21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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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
몹시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하시는 일 잘 되시는지요. 졸작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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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1-07-06 1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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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좀 바쁜 일이 있어 선생님의 이 좋은 글
이제야 봤습니다.
문장 좋고 사유가 깊은 격조높은 글입니다.
선친께서 학식과 덕망을 갖추신 훌륭한 어른이셨구요.
친구분도. 따라서 그런 부모님 슬하에서 반듯하게
크셨으니 임선생님도 큰 영향을 받으셨다고 봅니다.
좋은 글 감상 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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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7-06 2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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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희 선생님,
몹시 바쁘신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작 읽어주시니 영광입니다.
항상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 말씀, 너무 좋아 보입니다. 열심히 사시느라 하마 세월조차
붙잡아 두신 듯, 늘 젊고 활기 찬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더불어 후배는 항상 선생님의 가르침에 소홀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선생님 내외분 두루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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