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뭘 하시렵니까
최원현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부시도록 곱습니다. 밝은 햇살을 향해 심호흡으로 살아있음을 감사합니다. 문득 삶이란 시간이고 하루는 신이 주신 시간쿠폰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쿠폰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 주어지는 쿠폰입니다. 하지만 쓰는 사람에 따라 결과와 효력은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하찮게 여기고 아무렇게나 사용하면 값없는 쿠폰이 되기도 하고 없었던 것처럼 흘러가 버리기도 합니다.
한 때 95세 노인의 글이 인터넷상에 회자되었습니다. 그가 30년 전 그러니까 65세 정년을 맞으며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생은 덤이다’ 생각했던 것이 무려 30년을 덧없는 삶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뭔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던 그는 30년이나 더 살았고 95세 나이에도 건강하니 앞으로도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일 아니냐고 후회 하면서 지금부터라도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시작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10년 후 맞게 될 105번째 생일 때 왜 95살 때 아무것도 시작하지 안 했는지에 대해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랍니다.
제 수강생 중에는 여든이 넘은 분이 계십니다. 46년을 초등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정년을 했는데 정년 후 10여년은 마라톤에 빠졌답니다. 그러다가 문득 살아온 삶을 정리할 겸 그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더랍니다.
그렇게 그는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고 팔순이 되던 해에 수필가로 등단을 하여 1년에 한 권씩 2년 만에 두 권의 수필집을 냈습니다. 그 수필들이 모두 뛰어난 글들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2년 동안에 책 두 권 분량의 글을 썼다는 것은 최소한 한 주에 한 편 이상 글을 완성시켰다는 말이 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늘 새롭게 도전하고 시작하며 실행에 옮기는 그 분의 삶의 저돌성을 보며 인생이란 저래야 하는 것이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한 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이란 움직임과 동의어입니다. 더러는 나이가 드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늙은 모습을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걸 모르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 어린 모습으로 예쁘고 귀여워 사랑스럽고, 중년이 되면 중후한 멋이 풍기는 성숙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노년에는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큰 나무 같은 늠름함과 지혜로움과 산전수전 다 겪은 흔적들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냥 아름다워지진 않습니다. 곱게 아름답게 늙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며 부단히 자기를 가꾸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꽤 오래 전에 아내의 권유로 세 개짜리 단추 양복으로 바꾸는데 마음이 동하질 않았습니다. 길들여져 있는 것에서 조금만 바뀌거나 바꾸려 해도 생소하고 어색한 것이 우리 눈이고 마음인가 봅니다. 그러나 몇 번 입고 나니 단추 두 개짜리는 입기가 싫어졌습니다. 변화나 적응에 느리긴 하지만 다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개 정년 후 3년 동안에 십년은 늙는다고 합니다. 정형화된 일상의 틀이 깨어지니 몸도 마음도 적응을 못 해서입니다. 하지만 그 삼년을 유익하게 효율적으로 산 사람은 오히려 전보다 훨씬 젊어진다고 합니다.
제 수강생인 그 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참으로 바쁩니다. 내게 강의를 듣는 목요일 외에도 영어반, 일어반, 수채화반, 박물관대학 등에서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노인산악회도 들어 여행도 합니다. 이젠 자서전과 소설을 쓰겠다고 합니다. 저녁이면 생활신문의 영어 일어를 노트에 옮겨 적으며 공부를 하고 안양천을 걸으며 운동도 열심히 합니다. 그 분을 보면 그의 하루하루가 궁금해집니다. 그래 “오늘은 또 뭘 하실 겁니까?” 하면 씩 웃고 맙니다만 분명 다음 일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가만히 그 분을 보면서 20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봅니다. 저 나이에 나도 저럴 수 있을까. 그래서 요즘엔 “오늘은 뭐 하십니까?” 거울 앞에서 내게 정중히 질문을 해 봅니다. 신이 주신 하루라는 이 쿠폰을 누구보다 멋지게 써보고 싶어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