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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3-11-13 15:19
조회 :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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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래 전 종로3가 탑골공원에서. 끈 떨어지고 줄 떨어진 구경꾼들이 둘러서 있다. 쥐 한마리가 뿔뿔 기어가자 작은 널빤지 벽이 나타난다. 생쥐가 다른 길로 접어드니 또 벽이 가로 막는다. 실험용 쥐가 방향을 바꾼다. 그러자 알고 있었다는 듯 또 다른 방해물이 나타난다. 시행착오 끝에 작은 동물은 출구 쪽으로 향한다. 구경꾼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박수를 치려는 순간, 아차, 미련한 쥐는 방향을 틀어 출구로부터 쪼르르 멀어지더니 다른 곳을 헤맨다. 상황이 재개된다. 쥐 한 마리가 기어가자…. 상황은 되풀이 된다. 쥐 한 마리가 기어가자 널빤지 벽이…. 쥐 한 마리가 기어가자 또 다른 벽이….
바보 같은 쥐. 슬슬 짜증이 나려는 순간 설핏 의심이 든다. 쥐가 혹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출구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그러니까 내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면 너희들이 웃고 재밌어 한다는 말이지? 그럼 그렇게 해.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짜놓은 틀과 각본대로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내가 금방 출구를 찾아내면 재미 없잖아. 그것도 모르는 너희들이 무얼 알기나 해?"
그러고 보니 쥐가 출구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려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아니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얼핏 우리를 쳐다보았다. 쥐의 붉은 눈에 연민과 슬픔이 일렁였던 것 같기도 하다. 쥐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이처럼 망설이고 어쩔 줄 몰라 하면 되는 거야? 다음번엔 더 어려운 문제를 내보시지. 스프링 장치가 달린 쥐덫도 여기저기 설치해놓고 말이야. 내가 좀더 집중할 수 있도록."
쥐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진 닌자 거북이의 사부였고, 제다이 기사들 중 최고 신분인 마스터 요다는 내겐 당숙 아저씨뻘이 된다고. 그리고 이거 알아? 무슨 '유대계 쥐'도 아니고 애초에 '실험용 쥐' 따위는 없다는 거. 그러니까 혼동하지 말도록 해. 내가 어떻게 실험용 쥐가 되려는 역사적 사명을 타고 태어났겠어? 이를테면,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로 태어났다'고 쉽게들 말하지만 어떻게 부모 없이 고아로 태어나겠냔 말이야. 태어 난 다음에 재수 없이 실험용 쥐가 되거나 고아가 되는 것이지. 이건 아주 중요한 거야. 본질적인, 선후의 문제니까."
내 친구들에 대해서도 말해 볼까? 쥐의 푸념은 동종유사 동물로 옮겨 간다. 우선 다람쥐. "다람쥐는 모습이 귀엽고 재주가 많아 음험한 나처럼 괄시받지 않는다고. 끝없이 쳇바퀴를 돌릴 줄 아는 필살기를 갖고 있지. 또 주식부자 다람쥐는 게임중독자이기도 해. 도토리를 모으잖아. 그것도 남들이 자는 밤에만. 다람쥐는 쳇바퀴에 올라타고 미래를 향해 내달리지만 사실은 과거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지. 지나간 바퀴에 올라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기의 뒷모습을 보잖아. 그래도 미심쩍긴 하나봐. 내려서 잠깐 쉬기도 하니까. 그러다 다시 바퀴에 뛰어 올라 앞으로 내달리며 과거를 초혼(招魂)하는 거야."
다음엔 박쥐 차례다. "박쥐는 좀 특별해. 새도 아닌 것이 짐승도 아닌 것이 낮과 밤을 거꾸로 살잖아. 정체성에 흔들리는 박쥐는 나보다 더 불쌍한 동물이라고도 할 수 있어. 낮에는 동굴 벽에 거꾸로 붙어서 자다가 '고담시' 밤하늘에 푸른 달이 뜰 때면 허공으로 날아오르지. 야경꾼이 되어 타락한 도시의 밤을 지키려는 거야. 근데 궂은 일 좋은 일 다 하면서도 원망을 듣곤 해. 사서 분함을 당하는 꼴이라 할까. 왜 그런 일에 끼어들어 사태를 더 꼬이게 하느냐는 거지. 그래도 날개 달린 박쥐는 시궁창 쥐들의 세계에선 흠모의 대상이어서 '천사(天使)'라고 불린다고. 대천사 미카엘에게 제압당한 타락천사."
쥐의 한탄은 비슷한 처지의 다른 동물에게도 옮겨 간다. "투우장의 소가 생각나네. 소는 나처럼 '투척된 존재'란 말이지. 소는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모른 채 갑자기 원형의 미로 한 가운 데 내던져진 것이어서 열렬히 환호하는 관중들이 의아스럽기만 해. 왜 소라고 소외, 불안, 고독을 느끼진 않겠어. 다음 단계는 분노지. 나중엔 체념과 허무한 종말이 뒤따르겠지만. 마타도어의 검은 망토와 붉은 천 조각에 맥없이 휘둘리며 집단폭행을 당한 소는 등에 창과 서너 자루 칼이 꽂힌 채 모래 바닥에 검붉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죽어가는 소는 가쁜 숨을 내뿜으며 생각하지. "아,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무엇을 향해 달려들었담?"
@<<시에티카>> 2013 하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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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3-11-13 15: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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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그 쥐가 그리 말하길 얼마나 다행입니까. 항시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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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11-13 1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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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사람보다 더 빨리 읽고 올리기도 전에 핵심을 짚어내신 임병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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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권섭 |
13-11-13 1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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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에 대하여 달관을 하셨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존재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시골 마을에는 나무에게도 고사를 지냅니다.
400~500년 된 나무에게 말이죠. 佛家에서는 생명존중 사상이 근본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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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11-13 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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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마을에서 큰 나무에 고사를 지낼 때 저도 절했습니다, 김권섭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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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3-11-13 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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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리도 쥐의 입장과 생각을 정확히 짚어내셨는지요. 혹시 남모르게 교감하는 비법이라도? 마지막 투우장의 소의 이야기에선 가슴이 아프군요.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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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11-14 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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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쥐'니까요(쥐 띠에 태어남), 강승택 선생님.
'인간'의 '비인간적인' 폭력성과 허위의식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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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3-11-13 2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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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시골살면서 쥐잡는데 몰두해서 한해 겨울에만 삼백여마리를 잡아내던 기억이 납니다.그리고 또 쥐에 연민을 느껴서 쥐를 기르기도 한적이 있었지요.그러다 보니 또 못볼 것을 보고 눈물 흘린적도 있습니다. 눈먼자식을 항상 물어나르던 어미쥐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김창식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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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11-14 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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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엔 대대적으로 쥐잡기 운동을 벌이곤 했었죠.
어미쥐의 모정에 가슴이 찡합니다, 임재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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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3-11-14 0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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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면서, 왜 실존주의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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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11-14 1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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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존재의 운명이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순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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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3-11-15 1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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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떨어지고 줄도 떨어진 초인의 외침은 오히려 공허하여
비애마저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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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11-15 18: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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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초인들은 저의 6촌 당숙아저씨들이었습니다, 이희순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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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3-11-17 0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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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씩 만 던지고 가는 철학자들의 고단수에 덩달아 "잘 읽었습니다" 한 마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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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3-11-17 1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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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혜 선생님의 관점(철학하는 쥐와 동료들)은 제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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