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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임병식 |
날짜 : 13-10-17 14:14
조회 :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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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도(耕作圖)
임병식
책장 서랍을 정리하다가 예전에 사두었던 액자를 발견했다. 네 개가 한 묶음으로 묶여있는데 사놓고서 포장도 뜯지 않는 상태였다. 언제 샀더라. 그것을 들여다보다 이내 거니를 챘다. 직장생활을 할 때 가끔 잡상인이 물건을 팔러 사무실을 들른 때가 있었는데, 어떤 장애인으로부터 산 기억이 난 것이다. 여름철인데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 비지땀을 흘리며 이층까지 걸어 올라와서 통사정을 했다. 그래서 불편한 다리도 다리지만 비지땀을 흘리는 게 안 돼 보여서 하나를 놓고 가라고 했다. 값도 저렴했지만 용도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값을 치르고 집으로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대로 둔 것을 보면 적당한 용처를 찾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용도를 생각하지 못한 것은 꼭 어디에 쓰려는 목적이라기 보다는 그 장애인을 도와주려고 그냥 샀던 것 같다.
포장을 해체했다. 8절지 크기의 하얀 아크릴판이 덧붙여져 있는데 그 안에 사진이나 그림을 끼우도록 되어있다. 나는 그걸 보고서 잠시 용도를 생각해 보았다. 무엇을 끼워 넣으면 좋을까. 그러다가 이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전경을 담아놓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것도 농촌에서 땀 흘리며 농사짓는 모습을 담은 경작도(耕作圖)를 만들면 어떨까.
하지만 내게는 그런 그림이 없어서 당장에 끼어 넣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화가에게 부탁을 한다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예전에도 나는 그렇게 부탁하여 그려 둔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효(孝)를 형상화하여 담아놓은 그림인데 아이디어는 내가 제공하고 그림은 화가가 그렸다.
그 그림은 들밥을 내가는 엄마 등에 업힌 아이가 머리에 인 함지를 거들고 있는 구성이다. 나는 여기에다 효란 상형자 대로 아들이 노인을 무동 태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이가 엄마를 돕는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 하중이 엄마에게 고스란히 옮겨간다는 것을 착안하여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모성의 베풂은 한량이 없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그림은 안방에 소중하게 결려있다.
농촌의 사계를 생각해 본다. 나의 뇌리에서 봄은 매캐하게 보릿대 타는 연기 속에서 모판을 돌보는 농부의 모습이 곧잘 어려 온다. 그러면서 두레를 조직하여 모내기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화가는 전원 풍광으로 들녘의 원두막을 많이 그렸는데 그런 정경처럼 그즈음 이 곳 저 곳에서는 보릿대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런 속에서 농부들은 하루일을 마무지 지었다.
봄 풍경으로 그런 전경을 담으면 어떨까. 농사를 지으려면 우선 벼와 피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벼가 익을 무렵에는 누구나 쉽게 구별을 하지만 어린 모종일 때는 분간이 쉽지 않는데 노숙한 농부는 금방 알아낸다. 피는 벼에 비하여 약간 더 푸르고 매끈한 것 이외도 직감으로 알아내는 것이다. 모판을 살피는 것은 농사의 첫 단계이니 한해농사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여름 풍경으로는 퇴비증산에 몰두한 모습이 많이 그려진다. 고향에서는 추석을 쇠고 벼논의 두벌매기가 끝나면 일꾼들의 발걸음은 산으로 향했다. 푸나무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나무를 하기 위해 농부는 점심을 먹고 나서 낫을 가는데 정성을 쏟았다. 숫돌을 거치하고 손끝에 힘을 주어 한참을 갈다가 손끝으로 일차 슴베를 점검하고 마지막은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날을 살폈다. 그래서 파르스름한 서슬이 번쩍이면 다른 낫을 갈았다.
이런 낫을 지니고 산에 오른 농부는 해거름에 한 짐의 푸나무를 해서는 낟가리를 해두고선 축분(畜糞)을 뿌려서 퇴비를 만들었다. 그 정경이 또한 볼만 했다.
가을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번기이다. 그만큼 담아낼 풍경도 많다. 그렇지만 나는 그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한다면 온가족이 매달려 탈곡하던 모습을 담아내고 싶다. 한편에선 볏단을 옮기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계탈곡기에서 쏟아져 나온 알곡을 긁어모은다. 이것을 화폭에 담아놓는다면 그야말로 역동적인 모습과 함께 풍요로운 결실의 장면이 될 것이다.
겨울에는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거나 덕석을 만들지만, 경작도에는 보리싹이 나면 일제히 들에 나가 밟아주던 풍경도 정겨울 것 같다. 이렇듯 춘하추동 그림 속에 차례로 피사리와 퇴비 만들기, 탈곡과 보리밟기를 담아두면 그럴싸한 농경풍경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빈 액자를 들여다보니 네 개의 액자에는 벌써 고향풍경이 가득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농촌은 그렇게 역동적이지 못하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고령으로 인하여 활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그러는가. 옛날에 보던 그런 전경들이 더욱 그리워만 진다. 뇌리에 박혀있는 잊지 못할 풍속은 그저 추억속의 풍경일 뿐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더욱 그런 풍경을 담아보고 싶은지도 모른다..(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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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3-10-18 0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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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저희 집은 농사일은 안했지만,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큰댁농사를 도와주기도
하고, 학교에 다닐때는 바쁜 농가일손을 단체로 가서 도와주기도 해서 지금도 고향의
시골집이 자꾸만 꿈에 나타나곤 합니다. 그러니까 제 꿈의 주 무대는 꼭 어릴적 고향집
입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초가교회의 고향집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그려주신
고향그림도 제가 고향꿈을 꾸게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감사합니다. 임병식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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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3-10-18 1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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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바쁘게 보냈습니다. 충혼탑 참배에 이어 탈북자 여수지역 관광, 내일 여순사건 행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농사일은 안해보셨더라도 농촌에서 태어나셨으면 농촌정서는 공유하는것 것이지요. 저는 고향을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고 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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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권섭 |
13-10-18 0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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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선생님의 약자와 장애자를 위한 고운 마음씨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농촌사계의 경작도는 명화 중의 절경을 보는 듯합니다.
글을 통하여 아름다운 마음씨와 깨달음을 얻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순간에서 영원을 지향하는 참된 마음은 영롱한 아침 이슬에 투영되는
거룩한 천사의 미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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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3-10-18 1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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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는 자기를 키워준것은 팔할이 바람이라 했는데 저는 가슴속 그리움을 키워준 것은 순박했던 농촌 고향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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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3-10-18 0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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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도를 읽고보니 농촌의 사계에 대한 정경이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이렇듯 글은 상상의 뿌리가 아름답고 평화로워야 읽는사람도 같은
느낌이 되는것 같습니다. 그림의 색깔도 물론 사계에 따르겠지요.
임선생님의 탄식으로 맺는 말씀도 공감하는바입니다. 그런데 제가 문득
생각나는것은 노령화된 농촌의 사계 모습은 어떨까하는 것입니다.
좀 말이 안되기도 할것 같습니다만 노인과 할머니들이 엮는 사계를
역동적으로 그릴수 있는 묘안은 없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현재의 농촌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속에서나마 힘을 얻을수 있는 그런 그림은 없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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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3-10-18 1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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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대단위 영농을 하는 곳이 있고, 특수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농가는 피폐하여 온기를 불어넣거나 역동성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는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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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혜 |
13-10-18 0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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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도를 읽으니 농촌의 풍경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문장의 묘미를 만끽하는 즐거움입니다. 새벽녘 잠결에 사그락 사그락 낫가는 소리를 듣던 일이 생각납니다. 부지런한 일꾼은 해가 일찍 뜨는 여름 아침 전에 소꼴 한 망테기 베어 오고는 했지요. 경작도가 그려지면 잊혔던 풍경이 영원히 간직 될 듯하여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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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3-10-18 1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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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여물 먹는 소리는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만큼 듣기가 좋지요. 꼴망태에 풀어 베어 나르던 일이 어제인듯 생생하기만 하답니다. 경작도 구상은 어쩌면 영원히 미제로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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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3-10-18 0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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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선생님
선생님 작품을 읽으니 어린 시절 농사일을 도우면서 학교 다니던 일이 생각납니다. 당시에는 지겹고 짜증났지만, 지금은 삶에 풍요로운 양식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음 속으로 그린 선생님의 그림도 농촌의 삶이라는 경험이 없으면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은 불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공감 또 공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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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3-10-18 1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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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 자란 사람은 공유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솟돌에 간 낫을 들고 들판에 나서는 일은 그야말로 정직한 노동을 하는 과정이어서 살아있다는 진정한 맛을 경험하던 일이 아닌가 합니다. 밥값의 의미를 생각하는 경험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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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3-10-19 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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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도, 글제를 보며 내용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참으로 아련해오는 아름다운 동경이요 풍광입니다. 어떻습니까. 비록 농촌의 현실이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지만, 그래서 더욱 경작도에 담긴 선생님의 정서가 살갑고 아련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잔잔한 여운이 그리움처럼 남는 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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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3-10-19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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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당대의 풍속화를 많이 남겨서 그 시대상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잊혀져가는 풍속을 모르고 자라는 후대들이 글로나마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구성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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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3-11-03 2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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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빈 액자에는 경작도가 가득합니다. 농촌서 살아보지 못하고 비정한 대처를 살아온 몸이라 쓰신 글 한 줄 한 줄이 아득히 먼 고양 이야기 같습니다. 수필이란 이렇게 써야겠구나 하면서 보았구요. 수고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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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3-11-04 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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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선생님, 작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어디라도 떠나고 싶지만 발목이 잡혀서 꿈쩍을 못합니다. 환정기에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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