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명화
여름이 익어가고 있다. 여물어 가는 잎새만큼 꽃들도 계절에 맞춰 열정을 다해 피고진다. 시선을 끄는 눈부신 꽃도 많지만, 눈길도 받지 못하고 저 홀로 피었다 저버린 초라한 꽃들도 많다. 그래도 꽃은 꽃이다.
사람도 저마다의 꽃을 피우며 산다. 장미꽃처럼 화려하게 피우는 사람도 있고, 들꽃처럼 은은하게 피우는 사람도 있고, 간혹 꽃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영조와 정조의 가족사는 파란만장하다. 험난한 가족사를 잊기라고 하려는 듯 정치적으로는 개혁군주라 불릴 만큼 그 업적도 크다. 18세기는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릴 만큼 문예의 꽃이 활짝 피었던 시기다. 다산(茶山)정약용, 연암(燕巖)박지원, 겸재(謙齋)정선, 단원(檀園)김홍도에 이르기까지 우리 귀에 익은 인물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귀에 익지 않은 인물이라 할지라도 문예의 꽃을 피운 이들이 많다. 역사를 재조명하는 새로운 발견은 끝없이 우리 귀를 쫑긋 세우게 한다.
표암(豹菴)강세황(1713~1791)탄생 30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이란 주제로 전시회가 있다기에 찾아 나섰다. 고개가 갸웃거릴 만큼 낯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꼭 보고 싶었던 것은 60대에 이르러 장원급제했다는 것과 단원의 스승이라는 데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강세황은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강현의 막내아들로 전형적인 양반의 명문가 출신이다. 큰형의 잘못으로 30여년을 야인(野人)으로 사는 동안 어쩌면 그는 내재된 끼를 발산하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타고난 예술가였다. 시문집「표암유고(豹菴遺稿」, 화집「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산수화, 초상화, 사군자화, 그밖에 다양한 서예글씨, 그림의 평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시.서.화.(詩書畫)를 통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되는 103점의 작품만 보더라도 그의 찬란한 예술세계의 면모를 짐작케 한다.
전시회에 나온「강세황의 초상(보물590-2호)」은 당대 최고 초상화가였던 이명기가 그린 것이다. 그렇지만 화가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표옹자지(豹翁自誌)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도 남겼다. 얼굴 표정 하나하나가 섬세하기도 하지만 마치 사진을 복사한 듯 초상화 모두가 똑 같다. 특히 개성을 여행하며 그린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의 재능과 탐구정신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원근법과 색깔의 농도, 그리고 입체감을 표현하는 음영법은 그 당시 감히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였다. 복숭아, 꽃 등 정물화의 채색 또한 서양수채화풍에 속한다. 무를 그렸으되 생무가 그대로 종이 위에 누워 있는 느낌이다.
걸작 우금암도(禹金巖圖)는 강세황의 아들이 전라도 부안의 현감으로 있을 당시, 그 일대를 여행하며 그린 것이다. 눈으로 본 그대로 가늘게 쪼개진 바위를 개성 있는 필치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에 소장품으로 이번에 처음 국내에 공개되는 작품이라 하니 눈길이 더 간다.
현대인들이 여행갈 때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처럼 강세황은 대문 밖을 나설 때는 항상 종이와 붓을 지니고 다녔다. 주문에 의한 그림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보고 느낀 것을 일기 쓰듯 그림으로 그렸다. 개인적으로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자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시된 작품, 난죽도권(蘭竹圖卷)은 구성자체도 시원시원하지만 필력도 돋보인다. 사군자의 의미를 잘 살린 작품으로 화가로서 완숙의 경지가 느껴진다.
할아버지 강백년, 아버지 강현의 뒤를 이어 강세황까지 삼대가 연속으로 정2품 이상의 관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에 입소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에 제자 김정희가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라는 필체를 남겨 스승의 가문을 후세에 알려주고 있다.
그 당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얕잡아 이른 말로 환쟁이라 했다. 선비들 사이에서 그의 예술세계가 도마 위에 올랐다. 명품가문의 사람이 어찌 그림을 그리느냐며 조롱하기에 이르자 그는 주저 없이 붓을 꺾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예술혼을 타고난 영혼의 끼는 잠재울 수가 없었다. 그림대신 강세황은 화가들의 작품에 화평을 써주기 시작했다. 이인문의 ‘십우도(十友圖)’ 심사정의 ‘경구팔경첩(京口八景帖)’김홍도의 ‘행려풍속도’등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많은 화가들의 그림에 친필로 화평을 남겼다. 그 화평 한 줄 한 줄이 시가 되고 명필이 되어 남아 있다.
앤 설리반 Anne Sullivan) 선생이 없었다면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의 감동어린 이야기도 없을 터, 스승 강세황이 없었다면 조선의 최고화가 김홍도의 존재는 어찌 되었을까?
훌륭한 스승과 빛나는 제자의 업적, 활동, 그림등을 세세히 살펴보니 그 예술적 감각이 어딘가 닮은 듯 한 느낌이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이 있다. 머리는 관대를 썼고 옷은 야인의 옷을 입고 있는 강세황의「자화상」이다. 즉 마음은 산에 있는데 몸은 벼슬길에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림 옆으로 ‘가슴엔 많은 책을 간직했고 붓은 기세가 오악(五嶽)을 흔들 정도였다.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만 나 스스로 재미를 삼는다’고 쓰여 있다. 스스로 걸어온 길을 긍정하는 거장의 여유가 느껴지는 가슴 뭉클한 말이다.
18세기 예술을 풍미한 화가 강세황, 그는 분명 타고난 예술가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 이름이 희미한 것은 몸을 낮춘 겸손, 즉 선비의 정신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다행한 것은 이제라도 그의 예술적 가치가 빛을 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이랴.
첨부/*표암 강세황(1713~1791)의 탄신 30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6월25일~8월25일까지)이 열리고 있습니다. 타고난 예술가의 해박한 지식과 안목을 바탕으로 비평가로서도 업적을 남긴 분으로 그의 예술세계를 진하게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관람은 무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