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을 했더니 예상한대로 장기간 요양 중인 부인을 간호하고 있어서 병문안도 할 겸 그 병원으로 향했다. 친구 부부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젊었을 때부터 부인의 몸이 허약해 보였다. 대체로 나이가 들면 주부 살이라도 쪄서 그런대로 건강해 보이기 마련인데 이 부인은 지금까지 시종일관 병약한 모습이다. 날씨조차 잔뜩 찌푸려 음산하고 우중충하다.

길가 한쪽 모퉁이에 중고 시계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거실용 시계인데 겉은 멀쩡했지만 쓸 만큼 쓰다가 내놓은 모양이었다. 흰 종이에 싸인 펜으로 ‘필요한 분’이라고 써 붙여 놓았다. 버리는 대신 누군지 가지고 갈 기회를 주는 마음이 예쁘게 보여 다소 마음이 풀린다.

병실에 들어서자 누워 있는 부인 옆에 친구가 앉아 있다가 일어선다. 아주 건강하고 그런대로 미남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는데 병간호가 힘든지 좀 야윈 모습이다.

꽃이 병실에는 좋지 않다고 하여 빈손으로 왔다고 너스레를 떨자 친구 부부는 환하게 웃어주었다. 친구가 잠시 은행 마감 시간 전에 돈을 찾을게 있어서 다녀온다고 하여 병실에는 부인과 둘이 남게 되었다. 부인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되어 상의 좀 하자고 했다.

수년전부터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에, 다음에는 불안감 때문에, 그다음에는 아쉬움 때문에 벼르고 별렀는데 어떤 결론을 내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져 상의하는 것이라고 했다. 친구 부인과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주고받을 만큼 자연스러운 사이도 아닌데 자기들 부부관계를 거리낌 없이 꺼내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다. 잠자리를 같이 해 본지가 10년도 더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유는 딱 한 가지, 부인 자신의 건강 때문인데 남편은 불편함을 전혀 내색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사실 가까운 친구인 나도 그런 문제는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사실이라면 오래전에 그런 욕망을 버린 것이 아닐까 했다.

부인은 혼자 사는 사람 중에서 남편과 교제할 수 있는 애인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난감한 부탁이었다. 나는 평소에 친구가 그런 문제로 불편함을 토로한 사실이 없었고 그동안 잘 지내왔으므로 팔자려니 하고 체념하고 살면 되지 새삼스럽게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부인은 눈물까지 흘리며 자기 남편이 너무 불쌍하고 지금처럼 불행하게 사는 게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부탁하는 것이니 부디 거절하지 말라고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언제 변할지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또 내가 결혼 중개업소도 아니고 혼자 사는 여인들 모임에 무슨 직책을 가진 사람도 아닌데 당장에 마땅한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황당한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친구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배웅을 받으며 병원 문을 나서면서 길가에 놓여 있던 시계 앞에 붙여 놓은 ‘필요한 분’이라는 문구가 자꾸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