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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어머니의 유품

어머니는 초등교육도 받지 못한 체 9순 가까이 사셨지만 독학으로 한글을 깨치셔서 소설책을 줄줄 읽으시고 신문도 보셨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 남아선호와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은 시골에서 사셔서, 할아버지가 서당 훈장이셨건만 남녀 7세 부동석이라고 동네 머슴아들이 공부하는 서당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셨단다.

그러나 어머니는 쟁반에 모래를 담아 남동생들이 공부할 때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치셨고 약간의 한문도 그때 익힌 실력이라고 했다.
반듯하게 자란 어머니는 18세에 서울의 대가족 맏며느리로 시집을 와서도 지극정성으로 시어른들을 섬기며 빈틈없이 살림을 잘 해, 사랑 받는 며느리였다는 것을 고모들과 집안 어른들께 자주 들었다.

그러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어머니의 고행은 연속이었다. 아버지마저 병마 속에 사시다가 일찍 가셔서 5남매를 홀로 키우느라고 안 해 보신 일이 없다.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가면서도 자식들에겐 ‘아는 것이 힘이 이다, 배워야 산다.’는 말을 심어주셨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모토로 삼아 교훈하셨다.

어디를 가나 대접만 받지 않고 일을 하셨고, 어려운 이웃이나 친척들에게 인정을 베푸셨으며 언제나 깔끔하신 용모를 잃지 않으셔서 가신 뒤에도 지인들로부터 존경스러운 어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가 농촌으로 시집와서 젖소를 키울 때이다. 친정어머니가 어쩌다 우리 집에 오시는 날이면 난 철없는 딸이 되었다.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는 관절염이 심해 혼자서는 바깥출입도 못하셨다. 하루하루 쇠잔해 지는 몸의 통증을 안고 사시면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집안에서 할 일을 찾아 하셨다. 편히 쉬시라고 애원을 해도 죽으면 썩을 몸, 아껴서 무엇 하느냐며 조금이라도 나의 바쁜 일손을 돕겠다고 집안 청소, 빨래, 밥 짓기까지 도맡아 하셨다.
내가 남편과 바깥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어머니는 싱크대에 의지해 쓰러질 듯 비스듬히 서서 밥상을 차리고 계셨다. 그 뒷모습을 보는 나는 코끝이 시큰한데 어머니는 현관문 여는 소리만 듣고도 “시장들 하지 힘든 바깥일을 못 도와줘 미안 하네” 하셨다. 

가끔 내가 농민잡지나 일간신문에 생활글을 투고 해 발표가 되면 읽고 또 읽으셨다. 그리고 네가 작가가 되면 나의 일생을 소설로 써보라고 당부하셨는데 나는 어머니 가시고 한 참 뒤에야 겨우 수필집 한 권 상재해 어머니 무덤 앞에 받쳤다. 내가 시간 날 때, 책을 읽고 있으면 행여 방해 될까봐 즐겨보던 텔레비전도 끄고 조용히 문 닫고 다른 방으로 가셨다.

친정동생이 모시러 온다는 날은 더욱 바삐 움직이셨는데 빨래걸이엔 빨래가 빈틈없이 걸려있고, 밑반찬을 넉넉히 만들어 놓으셨다.

해거름에 친정 동생이 왔다. 그동안 나는 어머니께 일만 하다 가시게 해 죄송하다고 하면 어머니는 오히려 늙은이에게 할 일을 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연세에 눌려 힘겹게 현관문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그만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우리가 목장을 접고 외손녀를 돌보게 되면서 어머니는 새사람이 보고 싶다며 자주 오셨다. 아이가 귀여워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시는 모습을 보며, 우리와 함께 살자고 말씀드렸더니 이내 대답을 못하셨다. 

아들들이 있는데 딸집에 산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가족회의 끝에 내 집으로 오시던 날, 어머니의 짐은 간단했다. 당신이 쓰시던 모든 물건 다 버리시고 사철 입을 외출복과 평상복 몇 벌, 그리고 자주 들고 다니시던 가방 속에는 장로인 오빠가 선물한 성경책과 자녀들의 전화번호와 생일이 적힌 수첩과 몽당연필, 돋보기안경이 전부였다.

나는 아가 옆에 어머니의 이브자리를 깔아드렸다. 자나 깨나 아이의 기저귀가 젖을세라 갈아주었고, 때맞추어 품에 안고 젖병을 물리셨다. 목욕도 손수 시키셨다. 기저귀와 갓난아이의 옷은 더러운 어른들의 옷과 함께 세탁기에 빨면 아니 된다며 손빨래를 하셨다. 걷기가 힘들어 네발로 기어가다니면서도 매일 샤워를 하셨다. 아가방에서 늙은이 냄새가 나면 안 된다면서.

그렇게 2년 동안 우리와 함께 사시다가 겨우 3일 몸져누워 앓으시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시더니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머니가 아들들의 보호 속에 구급차에 실려 대문을 나서던 날, 청초라서 날씨는 매섭게 추웠다. 나는 손녀와 창밖으로 그 모습을 내다보며 어머니가 마지막 가시는 길일 것 같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오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분내 같은 향긋한 어머니의 체취가 묻어있는 이부자리에 엎드려 통곡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늙어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한다는 말씀을 기도처럼 되 뇌이셨다. 이제는 어느 자식이고 밥걱정 없이 살건만 내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너희들이 준 용돈을 모아두었으니 그것을 쓰라고 하셨다. 입원비가 비싼 중환자실에 여러 날 머물다 가셨지만 어머니의 뜻대로 치료비를 내곤 우리 형제들은 머리를 맞대고 깊은 사랑에 울음을 삼켰다. 
 
지금도 내가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유품은 성경책과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손가방이다. 몸도 마음도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아낌없이 쓰시고, 깨끗하게 부지런히 사시다가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고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나도 이 세상 문 닫는 날,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을 닮고 싶은데 어머니처럼 살지 못한 나는 어찌해야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