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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2-06-24 14:13
조회 : 2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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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김창식
며칠 전 일이다. 화사한 날인데도 사물의 윤곽이 흐릿했다. 먼 산에 아지랑이가 낀 듯, 안개 속을 거니는 듯, 눈앞에 곤충이 날갯짓 하듯 어른거렸다. 가까운 교통 표지판도 들떠 보여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참으로 세상이 수상하구나. 그래, 60줄이니 나도 늙어가는 모양이로다. 하긴 그럴 때도 됐지. 그래도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노화현상이 늦게 찾아오는 것일 거야.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가만, 눈앞이 어른대고 흐릿한 것은 원래 삶 자체가 모호하고 불안정해서 그런 것일까? 그럴듯한 자위를 해보아도 석연찮은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이럴까? 컴퓨터 작업을 많이 해서 눈에 과부하가 걸려서 일까. 아마 그런지도 모른다. 주로 컴퓨터를 사용해 글을 쓴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초고는 육필로 쓰더라도 컴퓨터에 저장한 후 수정 작업을 한다.
원래 글을 일필휘지로 써대지 못하는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쓴 글도 몇 번이고 고쳐 쓴다. 외부 원고는 마감 날까지 끊임없이 고쳐 쓴다. 됐다 싶어 발송하고 나면 당장 잘못된 부분이 눈에 띈다. 꼼꼼히 수정하여 재전송한다. 인쇄돼 나온 글에 또 오탈자가 보이면 그만 자해(自害)하고 싶다. 나는 안경을 껴서인지 까다로울 것 같다는 말을 주위로부터 듣곤 한다. 그 말이 맞는 듯하다. 특히 '옷, 여자, 글' 세 가지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그럴 사람도 없지만.
평소 으레 그러려니 안경을 쓰고 벗지만 그에 따른 상황 변화는 변검(變瞼)을 보듯, 비온 뒤 먹장구름을 뚫고 열리는 하늘을 보듯 신비하다. 안경을 걸치는 순간 먼 곳의 산하(山下)가 친밀한 사람처럼 얼굴을 들이대고, 가까운 건물과 풍경들에게 선명한 규격(規格)이 생겨나며, 새 옷을 갈아입은 주변의 작은 사물들은 저마다 느낌표(!)를 단 채다. 안경을 벗으면 이 모든 것들은 일순 수런거림과 움직임을 멈추고 교교한 잠속으로 빠져든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아 쓰는 내게 안경은 숨을 쉬지 않을 뿐 필수불가결한 장기(腸器)다. 안경을 쓰는 사람에게 안경의 고마움은 다른 무엇과 비교할 바 아니다. 그것은 사용자와 한 몸이어서 분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글 쓰는 일도 나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다.
왜 글을 쓰는가를 생각한다. "일상적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어 미시적인 의미를 찾고자?" "방황하는 한 노력하는 존재이니까?" "모험하려고? 모험하지 않은 것도 모험이므로?" 차라리 "그냥, 그저, 대책 없이!"가 그럴 듯해 보인다. 여기(餘技)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처음엔 남을 위로하고 인간성에 기여하려는 거창한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던 것 같다. 쓰다 보니 실은 그것이 나를 위로하는 행위에 다름 아님을 깨닫게 됐지만.
글을 쓰지 않고도 태연히 살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됐으니 무거운 짐을 진 것이 아니겠는가? 글을 쓸수록 삶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아 막막하기도 하다. 원래 글 쓰는 일 자체가 삶의 외곽을 더듬는 것일까. 어쨌거나 글 쓰는 일이 삶의 존재 이유처럼 작용하니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예술의 본질은 궁핍과 결여에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크기와 종류는 다를지언정 누구에게든 결손 부분이 있을 것이다. 글쓰기의 효능이 '소통(疎通)'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실은 '결핍된 부분을 내보이고 그것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닐는지.
이제 진실을 말해야겠다. 사물이 어렴풋이 보인 것은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했다. 책 읽을 때 쓰는 안경을 무심코 쓰고 나간 것이다. 어처구니없지만 작은 실수라 해서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밤눈이 어두운 내가 비 내리는 저녁 돋보기를 쓴 채 승용차라도 몰고 나갔다면 큰 어려움을 겪었을 터이다. 실수의 교훈은 비슷하거나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음에 있다. 하찮은 실수가 성찰로 이어져 큰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으련만.
생각을 진전시켜 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사소함'이 때로 세상을 바꾸는 씨앗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작은 일이 다만 시작되고 오직 꾸준히 지속된다면……. 그것에 우리네 삶의 참다운 비의(秘意)가 있는지 모른다. 내 글쓰기 역시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다방면으로 섭렵하고[多讀], 수련을 멈추지 않으며[多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면[多商量)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꿈꾼다. 산들 바람이 바위를 깎고, 물방울이 쇠를 뚫으며, 나비의 끊임없는 가녀린 날갯짓에 큰 바람이 불고 해일이 일더라.
* <에세이 문학 2012 여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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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2-06-26 0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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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에 대한 김창식 선생님의 수필 잘 읽었습니다. 저도 눈이 나빠 돋보기신세를 지고 있지요. 정년퇴임을 전후해서 돋보기가 포함된 안경을 맞추어서 꼈다가 수술한 귀에 안경다리가 파고드는 아픔때문에 포기했습니다. 요즘도 돋보기에 의존하고 살고 있습니다. 제눈에 안경이란 말 처럼 이 세상도 그렇게 내가 편하게 들여다 보며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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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2-06-26 1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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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이 가뭄과 더위에 어찌 지내시는지요?
안경 다리가 귀를 누르는 '참을 수 없는 사소한 고통'은 안경 쓰는 사람만이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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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2-06-29 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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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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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2-06-29 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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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순 선생님, 오랜 만에 뵙습니다.
성경에 그런 경구가 있었군요. '스룹바벨'은 어떤 사람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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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2-06-29 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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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반갑습니다.
B.C 6세기에 예루살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정복되고 성전도 파괴당합니다.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갑니다. 이 때 포로로 끌려간 여호야김 왕의 손자가 스룹바벨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성전건축의 사명을 받아 포로귀환 후 새로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구약성경 '스가랴'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성전은 과연 어디에 건축되어야 하는지 생각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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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2-06-29 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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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이희순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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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2-07-08 0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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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소재로한 수상록으로 감상했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의 큰변화는 가끔은 참을수 없는 존재의 사소함
이 원인이 되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주류가 항상 고고히 흐르는 것 같지만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지류
때문에 주류의 방향이 바뀌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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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2-07-09 0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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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짙철 선생님 말씀에 깊히 공감합니다.
"우연과 광기가 역사 발전의 동인"이라는 말도 생각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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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12-07-14 10: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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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써놓고 보면 왜 그리도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안경을 쓰신 김선생님께서 이렇게 안경에 관한 글을 써놓으시니 더욱 공감의 확대가 분명한 듯합니다. 상식과 지식의 문장에서 선생님의 타월한 글 솜씨가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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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2-07-14 1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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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원명화 사무국장님. 글을 쓰고 난 후 다시 보면 왜 그리 손댈 게 많은지요?
문장 표현도 그렇거니와, 글에 나타난 나의 심정과 관점이 정말 진실된 것인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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