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맡아 보는 비릿한 해초 냄새가 정겹다. 바닷가에는 갯바위 옆으로 작은 모래사장이 있다. 10평이 채 안되는 크기라서 모래 사장이라기 보다는 모래 둔덕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큰 파도라도 치면 금방 쓸려가 버릴것 같은데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냥 그만큼 남아있는 것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가왔다.

그 모래 둔덕의 주인은 우리 이웃집에 세들어 살았던 홍기였다. 내 또래였던 홍기의 아버지는 어부일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주인집 할머니가 무척 괴팍하여 홍기네 셋방에서 마루쪽 방문을 장롱으로 막아놓아 홍기네 식구들은 비좁은 부엌문을 통하여 마당으로 들락거리고 살았다. 바우라고 하는 그 할머니의 손자가 있었는데 홍기보다 두 살인가 위였고 힘도 세고 덩치도 컷는데 유난히 코가 뭉뚝하게 생겨서 개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던 아이였다.

바우는 장난이 심하고 짖궂어서 착한 홍기만 보면 공연히 괴롭혀서 홍기는 바우를 아예 개코라고 부르며 아주 싫어헀다. 그런데 홍기는 바우뿐이 아니라 동네애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당시에는 아이들이 갯바위 옆에서 자맥질을 하며 성게 따위를 줏어 올려 돌로 까먹는 재미로 놀았는데 홍기는 저혼자 모래 둔덕에서 모래속으로 손을 넣어 두꺼비집을 만들어 놓고 그 주위에는 모래 울타리를 쌓아서 자기만의 성을 짓는 것이다. 이따금 아이들도 홍기옆에서 같은 장난을 했는데 그 얌전한 홍기도 누구든 자기 울타리로 다가서려고 하면 양팔을 벌려 돌아가도록 완강한 태도를 보여 종종 옥신각신 하던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래성만이 유일하게 홍기가 자기 마음대로 지킬수 있었던 안식처였던 것이다.

간밤에 치던 파도에 홍기가 지어 놓은 모래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면 홍기는 다음날 모래둔덕을 찾아 아무 불평도 없이 묵묵히 어제와 똑같은 모래성을 만든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일찍 갯바위로 나갔는데 어제 만들어 놓은 홍기의 두꺼비집 모래 울타리가 조금 부숴져 있었다. 고쳐 주고싶어 모래로 다둑거리고 있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서 올려다 보니 홍기가 내 모습을 쳐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나는 홍기의 모래성 울타리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홍기는 나를 큰 원군으로 생각했는지 아예 다른 아이들이 모래둔덕에 올라서기조차 불편할 정도로 울타리를 더 넓고 크게 만들어 놓았고 우리 둘은 그속에서 두꺼비집을 여러채 지으며 놀았다.

하루는 이모습을 본 바우가 시기심에서 그랬는지 홍기의 울타리를 발로 걷어 차면서 여기가 네땅이냐고 하며 시비를 걸었다. 항상 바우한테 당하기만 하던 홍기도 이때만큼은 물러서지 않고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더니 개코 너 한번만 더 그러면 가만 안둘거야 하면서 전혀 딴 아이처럼 맞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우는 킁하고 콧방귀를 뀌며 네까짓게 어떻게 할래 하면서 울타리를 계속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그러자 홍기는 바우에게 달려들면서 멱살을 잡고 머리로 그의 가슴을 치받자 바우는 홍기를 힘으로 쓰러뜨려 깔고 앉는 바람에 두꺼비집이고 울타리고 모두 뭉개져 버렸다. 그때 홍기가 갑자기 얼굴을 들어 바우의 코를 물어 뜯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나 얼마나 세게 물어 뜯었는지 금방 바우의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 그날 저녁 홍기 아버지가 바우 할머니에게 손발이 닳도록 싹싹 빌던 생각이 난다. 그후로 난 그곳을 떠났기 때문에 이들과의 연락도 끊어지게 되었다.

언제인가 홍기가 아버지 뒤를 이어 어부일을 한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한번도 만나 본일은 없었는데 모처럼 시간적 여유도 있고해서 동네로 올라가 보았다. 젊은 이장에게 물어 본바 바우가 아직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이 되어 만날수가 있었다. 바우는 무척 반가와 했다. 옛날집을 반듯하게 수리하여 살고 있었다. 바우는 뱃일은 안하고 농사와 약초재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안주가 푸짐한 막걸리상을 받았다. 홍기 소식을 물으니 갑자기 침울해진다. 내가 떠난후 철이 들면서 홍기와는 형제처럼 의지하며 지내 왔을뿐 아니라 홍기의 모래성 쌓는 취미도 계속되어 두꺼비집 수준을 넘어서 모래로 온갖 조각품을 만들어 놓아 오가던 사람들이 감탄하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중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었는데 뱃일을 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에 배가 뒤집혀 아버지와 함께 실종 되었고 얼마후 홍기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소식이었다. 그후부터 홍기의 모래성도 볼수 없었고 열심히 일하여 자기집도 장만하고 장가도 들겠다던 소원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는 것이다.

홍기의 소박한 꿈은 파도에 쓸려 버린 모래성처럼 지워져 버린 것이다. 집칸도 있고 부쳐 먹을 논밭도 물려 받은 바우와는 달리 워낙 비빌 언덕이 없었던 처지라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을 쳐봤지만 아무것도 남겨놓지 못하고 그리 떠나 버린것을 생각하면 서글프고 씁쓸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홍기가 아무래도 인생은 어차피 부서지는 모래성처럼 공수래 공수거라는 교훈을 일깨워 주고 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