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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2-05-23 15:15
조회 : 2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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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夜鳥]
김창식
한밤중에 잠이 깼다. 꿈속에서 모르는 여자와 함께였다. 이제 더 이상 잠들지 못할 것이다. 등화관제가 된 어둠속에 초록색 야광시계 바늘이 바삐 돌아간다. 허리께가 시큰한 것을 보니 아침이면 에어매트리스에 촉촉한 습기가 배어 있을 것이다. 누가 텐트의 문을 젖히고 도둑고양이처럼 걸어온다. 보초근무자다. 나에게 교대시간임을 알리려는 것이다. 오늘 암호가 뭐더라? 그래, '레이지 버드(Lazy Bird‧게으른 새)'. 레이지 버드라니, 암구호치곤 우습구나. '얼리 버드(Early Bird‧일찍 일어나는 새)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참, 주임상사(SGM)가 그랬지. 그녀들을 조심하라고.
기초 훈련을 마치고 배속된 곳은 미OO군단(지금은 해체됐다) OO대대 차리포대(C Battery)였다. 8인치 자주포 4문이 갖추어진 부대로 휴전선에 가까운 소읍에 위치했다. 자주포는 탱크처럼 무한궤도로 움직이는데 포신이 크고 길어 우스꽝스럽게 생겼다. 우리는 한 달에 걸쳐 실시되는 야외기동훈련(FX)차 한탄강을 건너고 휴전선에 인접한 몇 개의 소읍을 가로질러 왔으며 오늘은 그 첫날이다.
지나온 마을들은 뒤숭숭했다. 카터 대통령이 몇 달 전 주한미군의 철수방침을 밝힌 때문이리라. 기지촌 사람들에게 미군 잔류 여부는 사느냐 죽느냐의 절체절명의 문제일 테지만, 연일 계속된 동원에 지친 때문인지 주민들의 시위 참가 열기는 시들했다. '미군철수반대'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쓰리쿼터를 개조한 임시 단상에 머리띠를 두른 몇몇이 확성기로 구호를 외쳐댔다. 그들은 그나저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몇 개 부대가 해체되고 단계적 철수가 시작되고 있음을.
코쿤(Cocoon‧슬리핑백)에서 기어 나와 구두를 꿰신는다. 텐트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선다. 야전잠바에 판초까지 걸쳤지만 밤바람에 소름이 돋는다. 산이 살아 있다. 물소리 바람소리, 깨어있는 동물의 울음소리. 나무와 숲이 수상하게 서걱거리고, 이 모든 것이 어울려 기괴한 화음을 이룬다. 교과서에서 읽은 '산정무한(山情無限)'이 생각난다. 내 경계지역은 방진(方陣)을 치고 있는 포대 정비구역인 모터풀(Motor Pool)의 4톤 밴(Van) 트럭에서 위장망으로 덮여있는 1분대 자주포까지다. 사주경계 중에 '보초근무수칙'을 암송하는 군인이 있다면 아마 그는 얼빠진 모범사병일 것이다.
기동훈련 전날 밤에는 사기진작을 위해 하사관 클럽(NCO Club)에서 쇼가 열리는 것이 상례였다. 브라스 밴드의 '쌍두(雙頭)의 독수리'를 시작으로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마술쇼에 이어 기다리던 하이라이트 시간이었다. 백조의 호수 중 '정경'이 흐르는 가운데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무희가 나타나더니 선정적인 춤을 추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한 열기, "테키로프(Take It Off, 벗어제껴라)! 테키로프!" 한 마음 된 합창. 한 꺼풀 씩 옷을 벗어 던질 때마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탄식 소리. 빈사의 백조. 백조의 죽음……. 나는 얼굴을 붉힌 채 빈 맥주 깡을 찌그러져라 움켜쥐고 있었다.
청춘을 지탱하고 움직이는 두 개의 축(軸)인 지성과 관능의 충돌이 빚는 불협화음은 오랫동안 나를 지배한 과제였다.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칸트의 개념과 직관에 대한 표현을 차용(借用)하면 '육체 없는 정신은 공허하고, 지성 없는 관능은 맹목'이었다. 그럼에도 한사코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본능위에 두려하였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둠의 형상을 한 육체의 부름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 앞길을 가로 막으며 음모의 춤을 추며 놓아주지 않았다. 정말 난 속수무책,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별안간 새 한 마리가 끼룩끼룩 울며 저편 산등성이로 날아간다. 어둠속 새의 형체는 어떤 새보다 크다. 나는 새가 사라진 방향으로 나도 모르게 걷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새가 된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믿기어진다. 다만 그 새는 깃털을 뽐내는 아름다운 새이거나 노래를 잘 부르는 새가 아닌,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며 밤에만 날아오르는 새가 될 것 같다. 잔설(殘雪) 가시지 않은 성긴 가지에 앉아 이승과 저승을 굽어보는 새…….
영혼이란 무엇일까? 과학자들이 말하듯 기화(氣化)된 에너지 생명체일까. 아니면 존재의 한 단계이자 한 양태인 것일까. 눈을 세게 누른 후 들여다보면 생기는, 개구리 알 같은 검고 노란 점들은 단순한 '포스핀(Phosphene‧발광이미지)' 효과가 아니라 영혼의 소립자(小粒子)인 것은 아닐까. 옷을 벗으면 몸이 있듯 육신을 벗으면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닐까.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와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은밀히 손잡고 있으며 현세의 삶은 그것을 이어주는 다리인 것일까. 아니 그들은 분리되지 않고 처음부터 거대한 '하나의 세계(unus mundus)'가 아닐까.
아차, 경계지역을 벗어났다. 상념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앞 쪽 숲 덤불에서 기척이 난다. 흠칫 놀라며 M-16을 부서져라 움켜쥔다. 온몸의 피가 얼굴로 밀려 따끔거리고 수많은 벌레가 기어 다닌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며 벼락처럼 소리를 내지른다.
"패스워드(Password‧암호)?"
덤불숲에서 사람의 형체가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어린 소녀였다. 여기저기 숲 주위가 움찔거린다. 같이 온 동료가 서넛 더 있는 듯. 보초를 서고 있는 것도 실은 이들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여자들은 '모포부대'로 불리는 위안부들이다. 그녀들의 참을성과 적응력은 군인보다 끈질기다. 생존과 직결되는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은 군인이 있는 곳이면 첩첩산중(疊疊山中)이든 어디든, 어떻게 해서든 출몰한다. 그녀들은 모포 한 장을 두르고 추운 밤을 모질게 견디어 낸 것이다.
"카투사(KATUSA)로군, 돈 있어?"
그녀는 한 푼의 놀람도 없으며 오히려 실망한 듯하다. 일시에 맥이 빠지며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동이 트려는지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나이 어린 매소부(賣笑婦)의 창백한 웃음을 보았다.
* 부평 삶의 문학상(2009)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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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2-05-23 1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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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선생님 ! 먼저 2009년도 부평 삶의 문학상 수상을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군대생활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는 저물고 노년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좋은 작품 감상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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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2-05-23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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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감사합니다. 다만 '부평...'은 별 것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그만.
저는 70년 대 초 법원리, 용주골 일대에서 자주포 대원으로 근무하다 나중 부평
'미제20지원단(ASCOM)'으로 옮겼습니다. 하, 벌써 40여년 전 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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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2-05-23 2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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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포대원 김창식 병사의 40여년전 병영 이야기를 이렇듯 손에 잡힐듯 펼쳐보일 수 있음은 만년 청년 김선생님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능력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작가회 홈피도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아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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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2-05-24 08: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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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못 뵌 터라 강 승택 선생님 안부가 궁금합니다. 여여하시지요?
1970년 5월 요맘 때 일입니다. 한달 일정의 야외기동훈련 기간 중 일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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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2-05-25 0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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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선생님, 40년 전의 카투사 김모 사병의 이야기는 참 격조가 높습니다.
'테키로프'와 '매소부'는 빼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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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2-05-25 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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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과 지성, 정신과 육체의 충돌, 뭐... 그런 것입니다, 이진화 선생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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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2-06-10 1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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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 참으로 가슴뛰는 기억입니다. 한자락 삶 속에 어찌 그 때를 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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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2-06-10 1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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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문 선생님, 오래 뵙지 못했습니다. 어찌 지내시는지요?
임 선생님의 병영 체험을 쓰신 '어느 병사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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