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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승애 |
날짜 : 18-03-15 22:15
조회 :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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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이승애
포장을 벗긴 책상은 마치 거친 숲에 홀로 서 있는 나목처럼 쓸쓸해 보였다. 거실 중앙에 버티고 있던 컴퓨터를 치우고 그 자리에 책상을 놓았다.
가끔 어머니께서 책상을 가져왔으면 하셨지만, 이사가 잦은 나로서는 선뜻 가져올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유품 중 가장 많은 사연과 의미를 지닌 책상을 팽개쳐 놓고 죄스러운 마음도 가질 줄 몰랐다. 그렇게 이십여 년을 지내다 이번에 시골집을 팔게 되어 가져오게 되었다.
아버지의 책상은 그 시대엔 보기 드문 의자에 앉아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의 책상의 형식을 갖춘 것이었다. 단단한 상판 아래 가로로 넓은 서랍이 있었고 오른쪽 아래로는 세 개의 서랍이 의좋은 형제처럼 위아래로 있었다. 그동안 빈집에서 오래 지낸 탓인지 외형은 거무스레하게 변하였고 반짝이던 손잡이는 벌겋게 녹이 슬어있었다. 알싸하게 배인 고독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내고 가구보호제로 윤택을 더하였다. 한결 말쑥해져 책상과 내가 가졌던 돈독한 관계가 되살아난다.
금방 닦아 반짝이는 금색 손잡이를 잡고 서랍을 열었다. 큰오빠가 하나하나 모아두었던 각양각색의 배지와 우표스크랩북이 먼저 눈에 띤다. 오빠의 사춘기는 수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배지나 우표를 구하게 되면 몹시 뿌듯해하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려 애를 썼다. 우표스크랩북을 펴들었다. 우표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것도 있었는데 인물이나 풍속, 문화, 지리, 명승지, 건물, 동식물 등 다양한 세계를 보여준다. 오빠가 모았던 우표와 배지는 자신의 좁은 지식 세계에서 보다 넓은 지식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였던 것 같다.
한 핏줄임을 증명하는 호적등본 한 통도 서랍을 지키고 있었다. 오래되어 종이는 비록 누렇게 변해버렸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지면 속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든든해진다. 또 다른 보물 상자 속에는 우리 사 남매가 받았던 상장꾸러미가 들어있었는데 그 속에서 내가 고등학교 때 받았던 선행상을 찾아냈다. 아픈 친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를 잘 보살핀다고 준 상장인데 지금 보아도 흐뭇해진다.
또 다른 서랍 속엔 젖은 눈으로 다가오는 언니의 시작 노트가 한 권이 있었다. 펜글씨로 또박또박 써넣은 수많은 시가 파도처럼 넘실거리다 명치끝을 누른다. 뜻하지 않게 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를 떠맡아야 했던 언니의 어깨는 늘 처져있었다. 어쩌다 그 짐이 가벼워질 때면 언니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며 희망의 끈을 당기곤 하였다. 우리는 언니를 통해 성장하고 일어섰다. 그러나 언니는 희망가가 완성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자 이번엔 낡은 의학사전 한 권이 아버지인 듯 반긴다. 늘 책상 위를 지키며 아버지의 조력꾼이었던 의학사전이다.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아버지 생전 하시던 말씀이 생생하게 귓전을 울린다.
“생명을 귀히 여겨야 한다. 아무리 못 할 짓을 한 사람이라도 도움을 청하면 기 꺼이 들어주어야 한다. 잊지 말아라. 나누며 살아야 한단다.”
실제로 아버지는 당신을 해친 사람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추운 겨울밤 이십 여리를 마다치 않고 달려간 적도 있었다.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고 정이 많으신 아버지는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선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았다. 어느 땐 사정이 딱한 환자를 집으로 데려와 몇 달씩 치료를 해주고, 불구가 된 아이를 고치기 위해 십 여리 길을 매일 다니신 적도 있다. 그로 인해 당신은 병까지 얻었지만, 환자의 병이 나을 때마다 얼마나 흐뭇해하셨는지 모른다.
책상과 아버지의 인연은 참으로 남달랐다. 이웃에 목수 한 분이 살았는데 그분 슬하에 두 아들이 있었다. 아들들은 모두 영특하였지만, 생활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를 딱하게 여겨 학비를 대주었다. 목수 어른은 고마웠는지 오동나무로 책상을 만들어 주었다. 빠듯한 살림에 귀한 목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고운 색을 입히고 금색 장식까지 달아 한껏 멋을 냈으니 그것은 단순히 받은 것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우정의 표현이었으리라.
어머니께서 책상을 대할 때면 ‘어찌 이리 곱게 만들었을까요.’하고 손으로 몇 번이고 쓰다듬곤 하셨다. 책상은 단순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만 필요한 게 아니라 목수 어른 집안과 우리 집안이 더욱 도타운 정을 쌓는 사랑의 도구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도타운 정으로 서로 오가던 아버지와 목수어른이 떠나시고 우리의 생을 북돋아 주던 언니마저 하늘나라로 떠나셨지만, 책상은 태산같이 남아 우리의 마음을 달래고 안정시킨다.
아버지의 삶과 철학이 담긴 책상이 떡하니 자리를 잡으니 근중한 바위처럼 집안에 중심이 잡히는 듯하다. 모니터와 키보드를 올려놓고 나는 자판기를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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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8-03-15 2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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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애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책상이 하나의 작은 역사책처럼 두 가문의 이력을 말해주는군요.
단순한 일상의 물건으로 넘겨버릴 수도 있는데 깊은 의미를 찾아내셨네요.
수필은 세계에서 의미를 발견하여 삶을 윤택하고 가치있게 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명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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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애 |
18-03-16 2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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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봉사의 눈을 뜨게 하셨지요. 앞으로 좀 더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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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8-03-15 2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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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상에서 묻어나는 추억들이 알알이 그렇게 영글어가고 있네요. 저도 수집이 취미인데 한번 몰입하면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지금은 도자기 수집과 골동품 서화등등을 수집하고 있는데 저 자신을 제어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승애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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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애 |
18-03-16 2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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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옛 것을 수집하시는 이유는 대한 그리움 때문이겠지요.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읽는 즐거움도 매우 크리라 생각됩니다. 선생님 참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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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8-03-15 2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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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매개로 한 가족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제는 책상 주인도, 만든 이도 떠나고 없지만 책상은 여전히 남아 옛날을 추억하게 하는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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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애 |
18-03-16 2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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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가구도 오랫동안 함께하다 보면 우리 가족의 무늬가 새겨져 정을 떼기가 어렵더군요. 책상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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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8-03-16 0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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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애선생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책상을 통하여 혈육의 정을 끌어내는 글솜씨가 맛깔스럽습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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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애 |
18-03-16 2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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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고맙습니다. 글이 많이 부족합니다. 앞으로 많이 가르쳐주셔요. 선생님 카페에 들러 좋은 글 많이 읽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많이 나눠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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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8-03-22 0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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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의 '창랑정기'를 읽는 기분입니다. 책상 하나로 가정의 역사를 꾸며 나간 것이 흥미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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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애 |
18-03-31 0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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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때입니다. 이 기운이선생님께 닿아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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