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난동 부리는 날인가 싶게 천둥번개가 요란하다.
베란다 창유리의 묵은 때를 벗기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 빗소리가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다.
긴 날을 집에 갇혀 있다.
이런 날은 특별히 무슨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니면서 마음속에 조바심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계속 책상에 앉아 있기 뭣하면 쑥뜸을 뜨면서 고요히 휴식을 청하기도 하지만 그 '고요히' 란 대목이 그리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다.
내가 고요하고 싶다고해서 고요해 줄 마음 상태가 못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이 극성스런 빗줄기를 덮어쓰고 어디론가 나설 수도 없지 않은가.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보나. 메일을 보낼 사람은 있던가.
그 숱한 페이스북도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하릴없이 연속해서 냉장고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한다.
D 엄마가 준 인절미가 보인다. 사과도 깎다 둔 반 조각이 있고, 찐 고구마도, 오징어도 있다. 무얼 먹을까. 배고픈 건 모르겠는데 속이 허하다.
그 '속 '이란 것이 분명 위장이라는 내장기관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허하다는 것은 영혼인가 육체인가. 그것도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초콜릿을 꺼내든다. 그때 마침 전화가 온다.
아, 비가 위협하듯 무섭게 쏟아지는 날 나처럼 냉장고문을 열었다 닫았다하는 목타는 중생이 또 있더란 말인가?
초콜릿을 한 개 책상에 얹어두고 전화를 받는다.
독도 여행, 백두산 여행을 늘어놓는 한 사람. 그는 한가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런 매력이 없다. 여행을 떠날 몸도 마음도 아닌 것이다.
내가 그 여행에 빠져도 지구는 돌고 그 모임은 여전히 들뜬 군상들로 활기가 넘칠 것이다.
여행 불참하는 이유를 구차하게 설명하다 보니 어느새 초콜릿이 녹아버렸다.
더운 물을 부은 것도, 책상이 뜨거운 열로 이글거리는 것도 아닌데 무참한 몰골로 녹아있었다. 초콜릿으로서의 값을 다할 수 없는 , 입에 대고 그것을 음미하고 싶은 생각조차 안 난다.
초콜릿이 녹아 있듯 지금 내 마음결이 심란스럽다.
녹아있는 초콜릿을 거두어 냉장고에 넣고 창밖을 바라본다. 방금 비가 그친 듯, 온세상이 조용하다.
녹아 있는 초콜릿처럼 내 일과는 약간 뒤죽박죽으로 진행중이다.
그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료들의 책과 함께 ,아니 더 오래도록 광화문교보문고 신간코너에 올라 앉은 내 책. 요즘은 대한민국 서점 중에서 판매실적이 노상 1위를 달리던 교보 광화문점도
예외없이 한산한 편이다.
내 책에 건 기대는 애초 욕심이었던가.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에 불과했던가. 그동안 나는 꿈을 꾸고 있었나. 여러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내일을 기약한다.
불과 며칠 후면 확연히 그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
며칠 후에다 막중한 기대를 둔다. 초콜릿이 녹으면 냉장고에 넣으면 되고, 기대가 어그러지면 계속 도전할 일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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