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단풍잎 다 떨어졌다. 꽃도 지고 밤하늘의 별빛도 스러졌다.

계절의 길목에서 꽃은 다시 피어오르고 나목에는 싹이 돋는다. 별빛은 간밤인 듯 여전하다. 그러나 청춘의 ‘영원한 사랑’은 헛된 맹세로 흩어지고 인생은 세월을 좇아 흘러간 길을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어스름이 깃드는 바람 잔 날의 나진 포에 고운 모래톱처럼 바닷자락 조수가 소리 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풍경을 연모하게 되었다. 섬들이 저물면 바다는 숨을 고르며 조촐한 하루의 보람을 화답하고 깊은 침묵에 잠긴다. 24절후가 차례로 찾아오는 어김없는 계절의 변화를 따라 나진 포의 바다는 왔다가 가고 갔다가 오기를 거듭한다. 오늘이 일곱 물 쯤 되는지 쾌청한 한낮에 온 동네 아낙들이 개에 나가 바지락을 캐고 있다. 아득한 옛적에도 바다는 그렇게 이 포구를 괴었고 백 년 전 어느 날에도 바지락은 풍성하였을 것이다.

불도 끄지 않은 채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나는 하염없이 괘종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고지식한 초침은 열한시의 가풀막에서도, 열두시의 마루를 지나 새 날의 내리막길에서도 보폭과 속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사람 사는 세상에만 설렁걸음의 내리막이 있고 숨이 턱에 걸리는 고갯길도 있는가보다. 나는 새벽 세시의 시계 속으로 들어간다. 시계는 세시에 하루를 여는 사람에겐 진자를 건너편의 아홉시에 보내주었다. 아흔 살의 수명을 약속한 것이다. 아침 여덟시의 잠꾸러기한테는 진자를 뒤로 물려 사십 수의 짧은 생애를 허락하고 있었다. 누구든 날마다 스물네 시간을 일주하면 열두시의 출발점에 다시 서게 될 터이니 가히 2갑자를 누릴 수 있겠다.

시간은 인생들의 세월을 가늠하며 늘 반란을 꿈꾸어왔다. 어떠한 사보타지도 허용되지 않는 영어(囹圄)의 공간 속에서 시간은 무단히 태업을 자행하였고 고금의 어떤 권력자도 이를 제지할 수 없었다. 시간은 인간을 향한 프로메테우스의 연민에 빠져 그의 창조주에 반기를 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업보로 말미암아 거북이가 되어버린 무죄한 시간을 탄하였다. 그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내의 표상들을 애써 외면하였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누구냐, 달마가 누구냐 하였다. 시간은 눈물을 감추며 가속페달을 밟았다. 시간의 가속도는 세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각삼추(一刻三秋)’였다. 3년 세월을 15분으로 압축시켜 준 놀라운 측은지심이었다. 시간은 세월을 아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달음박질을 놓아 더욱 많은 시간을 보장해주었다. 가장 행복한 부류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시간은 공평무사하지 않았다. 시간은 그를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기도하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자 시간은 치부책을 펴들었다. 그 두툼한 책에는 시간이 일각을 삼추로 베풀어준 자들의 이름이 빼곡하였다. 내가 눈여겨 본 것은 책머리에 적혀있는 이상한 공식이었다.

‘1각(15분)은 3추(3년), 1시간은 4각(12년), 1일은 96각(288년)’

나는 일각이 삼추 같다는 경구를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었는데 시간은 하루가 지옥이라는 사람에게 288년의 광속을 베풀어 주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분연히 시간에게 대들었다. 어불성설의 측은지심이 다 무엇이며 이 장책은 또 무엇이냐고 따졌다. 시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배은망덕을 지나칠 수는 없어요.”

압축파일을 여는 순간 일각은 삼년 세월을 바람처럼 스쳐갔다. 그러나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인생들의 슬픈 생애가 가여워진 시간은 288년의 빚더미를 일만 분의 일로 감해주었다. 시간은 새로운 공식을 따로 적어두고 있었다.

‘1일≒10일’

지긋지긋한 시간이라 원망한 자의 하루에 대하여 열흘의 빚을 받아내겠다는 산법이었다.

그 책에 내 이름도 적혀있었다. 나는 재빨리 내 이름을 에워버리곤 도망치듯 발길을 돌리며 시간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시간은 짐짓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사시와 절기와 연한을 정하신 이는 창조주랍니다.”

두 노인이 엎어질 듯 허리를 굽힌 채 유모차를 하나 씩 밀고 간다. 유모차는 무릎이 결딴난 노인들의 마지막 지팡이다. 늦가을 오후의 햇살을 등허리에 업은 안노인 둘이 나란히 걸어간다. 빈 유모차를 하나 씩 밀고 노인당 가는 길에 해가 저문다. 그때 젊은 엄마가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온다. 유모차는 호사스럽고 엄마와 아기는 봄날의 아지랑이 같다. 두 노인은 송기 막대기가 되어버린 두 팔로 각자의 유모차에 힘겹게 매달려 끌려간다. 허리가 꺾이다 못해 멍에처럼 굽었다. 나는 그 광경이 짠하여 눈을 떼지 못한다.

아기는 유모차에 실려 살아갈 세상을 구경하고 있다. 노인은 낡은 유모차에 매달려 살아온 세상과 이별하는 연습을 한다.

아기는 네 발로 기면서 하늘을 본다. 노인은 네 발 달린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 뼘의 땅바닥을 더듬는다. 아기는 뒤를 가릴 줄 몰라 그 어머니가 기저귀를 갈아주고 진자리를 빨아댄다. 아기는 지각이 없어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러나 그 옛날 시린 손 호호 불며 자식들의 기저귀를 빨고, 늙어서는 손주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어머니는 누구의 손에 하초를 내맡기는 부끄러움을 견디고 있다. 육신만 아기가 된 어머니의 무정한 세월이 서러워 목이 멘다.

시간은 단호하게 말했다.

“인생의 유한한 삶은 내 탓이 아닙니다.”

태풍이 휩쓸고 간 가을의 문턱에는 때 아닌 봄이다. 과목에도 가로수에도 초록이 새롭다.

저 기이한 ‘가을봄’의 정체에 대하여.

다시 오지 않는 인생과 되돌아온 시간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