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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희순 |
날짜 : 15-09-30 18:04
조회 :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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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1학년 봄, 여수 진남제의 학생 백일장에 나갔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남해바다를 굽어보고 계시는 자산공원 광장은 학생들로 붐볐다. 백일장은 시부와 산문부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한 학생은 시를, 나는 산문을 쓰기로 하고 참가한 것이다. 그러나 원고제출 시간이 다 되도록 내 원고지는 비어있었다. 명색이 학교대표로 출전하여 작품을 내지 못한 채 돌아간다는 건 말이 아니었다. 마감시간 이십 분전에야 겨우 필을 들었다. 궁지에 몰리다보니 예정에도 없는 시를 짓게 되었다. 우리를 인솔해간 국어선생님은 명문대 출신의 처녀 선생님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눈길을 외면하며 슬그머니 원고를 내밀었다. 뜻밖에도 선생님은, 좋은 작품이라며 기뻐하셨으나 내 이름은 불려 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더니 나를 데리고 심사위원석으로 달려갔다. 한쪽에 쌓여있는 원고더미 속에서 내 작품을 찾아내어 너덧 명의 심사위원들에게 내보이며 다시 심사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심사위원장은, 이미 입상자를 발표해버렸으니 재심사를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선생님은 심사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골학교라고 홀대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내 작품을 번갈아가며 읽어보더니 다시 머리를 맞댔다. 결국 예정에도 없는 시를 쓴 나는 예정에도 없는 상을 받게 되었다. ‘시부 4등 더욱상’이었다.
더욱상에 빛나는 그 시는 간곳이 없고 나는 그 시의 제목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케케묵은 상장만이 그날의 일화를 가만히 이야기해주고 있다. 선생님의 고운 이름마저 무심한 안개처럼 스러지고 보잘 것 없는 내 작품에 기뻐하시던 그 눈빛과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능금처럼 발갛던 선생님의 두 볼만이 가슴에 남아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동시 쓰는 법을 가르쳐주셨던 담임 선생님이 좋아 졸업 때까지 문예반을 지켰었다. 그러나 나는 시인도 되지 못했고 동시작가도 되지 못했다. 한때의 깊은 좌절이 문학의 꿈을 잊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중년의 불청객이 깊숙이 잠들어있던 문학을 일깨우며 불쑥 원고지를 내밀었다.
나는 늦게나마 기왓개미를 만들어 동록이 파고든 놋그릇들을 꺼내 닦고 또 닦는다.
요즈음의 칠십은 인생의 하프타임이라고 한다. 나는 겨우 진갑을 지나고 있으니 결코 늦지 않았을 터이다. 나는 인생의 반환점인 고희에 이르러 또 하나의 ‘더욱상’을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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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5-10-05 0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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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그 일때문에 수필을 쓰는 작가로 성장하신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든 계기가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그 선생님은
잊지 못할 분이 되셨겠군요.
심사위원들의 배려도 훈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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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5-11-21 1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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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아득한 시절 그날의 자산공원을 떠올리며 잠시 행복한 추억에 잠겨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더욱상'이라는 상 이름이 신통하다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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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권섭 |
15-10-05 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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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1학년 때 명문대 출신의 처녀 선생님 간택을 받아 백일장마당에 등극하는 영광을
가졌으니 얼마나 행복하고, 그리움의 씨앗이 알알이 영글었으리요!
더욱상에 선생님이 기뻐하고 햇살에 능금처럼 볼이 발갛했으면
행복의 황홀경이었겠습니다.
진갑이면 고희에는 동록낀 놋그릇 반짝거리듯 최고상이 대기할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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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5-11-21 1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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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생님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열심히 공부해보갰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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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15-11-03 0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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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상:
나름, 제가 무언가를 시작하려들면 "갈 때 가져갈 것이냐"며 초를 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서는 사람은 바로 마누라이지요. 나이를 생각해 보라는 거지요. 이방주 선생님의 <모기소리>와 선생님의 <더욱상>에서 힘이 솟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나이나 시기 상관없이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지만 제지를 당할 때 마다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온다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분의 말이 떠오르기도 하구요. 저는 가지고 가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구태여 이유를 들라면 <남겨두고 싶은 것>이거든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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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5-11-21 1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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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치 못한 글
격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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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5-11-03 1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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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순 선생님, 처음에 제목만 보고 무슨 뜻인지 몰라 그냥 지나쳤는데 이렇게 깊은 의미를 지닌 글인지 몰랐습니다. 놋그릇을 닦으면 반짝이듯이 나이들수록 닦고 또 닦으면 젊음 못지않은 혜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선생님께서 재미있고 의미 깊은 작품을 낳듯이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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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5-11-21 1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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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는 글, 격려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상장에 아득한 추억이 떠올랐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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