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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11-09-23 12:28
조회 :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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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거라
잠수함
종로 2가 탁구장에 날아들던 검은 헬리콥터가 낯선 마을 이름 없는 반군이 쏜 눈 먼 총탄에 맞아 추락해 형체도 찾을 수 없던 무렵 광화문 지하도에 수상한 잠수함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지하도는 흰 색과 하늘색의 조개껍질을 엇갈려 포개놓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보는 것 같았는데 최신 접안시설을 갖춘 아름다운 항구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뚜뚜뚜뚜' 떠오르는 잠수함의 환영을 보았다고 했다. 나도 사람들 틈에 섞여 그곳에 가보았음은 물론.
지하도 근처에 다다르자 발길은 붙박이처럼 머물고, 마음은 무지개를 보는 워즈어스처럼 뛰놀며,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스쳐 지나가고, 얼굴은 미열을 동반한 기대로 달아올랐다. 누굴 만날지도 모른다는 열망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람, 오래 소식 없는 친구…, 아니면 그저 아는 사이일 뿐인 사람이라도. 상관이야 없지. 그가 누구이든. 그 누군가 지하도에서 잠수함처럼 '불쑥',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가 내 손을 잡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인도 하여 주었으면. 그것이 잘못된 바람인지 누군들 알았을라고. 나는 나를 견인해 줄 예인선(曳引船)을 헛되이 기다렸다.
이제 다시 시린 바람을 맞으며 광화문 네거리 지하도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다. 단지 누가 내게 시간을 주었으면 좋으련 하고. 그런데 나는 후에 사람들이 덧붙인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잠수함은 한 번도 떠오른 적이 없었다. 잠수함에 문제가 있었을까. 그렇진 않은 걸로 보이지만 잠수함은 본디 출항허가도 없이 젊은 물살을 헤치며 먼 바다로 나아갔고 원인모를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다 날씬한 몸체를 비스듬히 모래톱에 파묻은 채 수초에 포박당해 있으리라는 것이다.
불침함
나를 안온하게 하는 것들. 눈 내리는 골목의 다향(茶香)과 숲길에서의 산책. 피톤치드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실비 내리는 날 가판대에 놓인 신문의 잉크 냄새. 아파트 단지 수은등의 파리한 불빛. 창틀에 내려앉은 나뭇잎이 전하는 일순(一瞬)의 서성임, 그리고 잠결에 귓전을 두드리는 빗소리.
잠잘 때면 이상하다. 의식의 부표(浮標)는 낚싯대의 찌와 같아서 무의식의 경계수면에 몸을 반 쯤 드리운 채 스치는 바람결에 춤추거나 솟아오르기도 한 순간 가라앉기도 한다. 잠의 표면에 떠올랐을 때 사람은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꿈꾸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를 경험하는데 이를 비몽사몽의 경지라 일컷더라.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 있으니 외계와 수상한 교접을 하는 것은 당연지사.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수용하기도 하고 무의식이 마름질한 메시지를 순간 이동의 통로를 통해 바깥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배수관을 타고 흐르는 빗소리를 듣거나(귓속의 이명 현상이다), 새가 우짖는 소리를 듣거나, 누구에겐가 무엇을 간절히 호소하거나(잠꼬대로 나타난다), 찰나적으로 예감을 떠올리기도 한다. 때로 아침이면 조금도 기억해내지 못할 꿈의 한 토막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기도 하는데.
누구든 잠잘 때 균일한 품질의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높낮이가 일정치 않으며 파장과 굴곡이 다른 잠을 잔다. 잠자는 동안 의식의 부침(浮沈)은 몇 차례고 되풀이 된다. 얕은 잠으로 시작해(REM 주기이며 이때 꿈을 꾼다) 서서히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눈꺼풀이 무겁다. 이제 흔들리던 부표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죽음의 바다에 허연 배를 뒤집은 물고기처럼 표면에 떠올랐다가 마침내 끝 모를 깊이 속으로 가라앉는다. 어렵사리 꿈을 빠져나와 또 다른 림보*의 터널 속으로…, 침몰하는 전함처럼.
한때 대양을 지배했고 불침을 자랑하던 배는 수백 전투기의 공습과 적 함정의 집중 포화로 장렬하게 격침된 것이 아니라 어이없게도 일각의 빙산과 충돌하여 소리 소문 없이 가라앉았다. 이제 위용스러웠던 배의 잔해는 붉은 녹이 슬고 구멍이 숭숭 뚫린 어초(漁礁)를 닮아 이름 모를 잡어들의 놀이터가 됐다. 물고기들은 그저 노래하고 춤춘다. 그들이 큰 싸움배의 굴욕을 어찌 가늠하겠는가.
* 림보(Limbo): 古聖所. 천국과 지옥의 경계지역. 본문에서는 꿈속의 꿈.
* 문학 무크 <<시에티카 04>> 2011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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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1-09-26 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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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거라, 잠수함과 불침함...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더러 꿈 속의 꿈을 꾸며 빠져나오려 애쓰는 경우가 있지요.
신경회로에 언어적인 정보가 아로새겨지면 그마저도 뛰어넘는 경험을 합니다만...
연일 맑은 가을 하늘이 자꾸 떠나라고 손짓을 하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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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9-27 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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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진화 전 회장님. 일종의 실험 수필인 셈인데요, 요즘
하도 퓨전, 하이브리드, 아방가르드 해서요. 전 사실 '잘 쓴 수필'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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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11-09-27 1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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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으로 들어간 줄 알았습니다. 현실을 뒤로 한 이야기속에도 삶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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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9-28 1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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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명화 국장님, 반갑습니다. 이처럼 실험적 형식으로 쓴 글이 여럿 되지만
아직 공식적으로는 발표하지 않았답니다. <<시에티카>>는 일종의 동인지 성격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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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1-10-01 0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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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에서 깨어나 하릴없이 밤 2시 꼭두 새벽에 컴 앞에 앉아보니 아무도 흉내 닐 수 없는 멋진 난해한 수필이 나를 부럽게 합니다. 가산 이효석을 말하는 것처럼 시를 배반한 수필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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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10-01 1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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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성철용 선생님께 오랜만에 안부 여쭙니다.
기승전결이 없는 은유적인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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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1-10-02 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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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글을 읽고 나니 꿈 속에서 깨어난 느낌입니다.
흉내도 못 낼 상상 속의 글이군요.
작가는 상상이 풍부해야 좋은 글을 쓴다는데
사색이나 상상보다는 행동으로 옮기는 방송 일을 하다보니
휴식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머리가 텅 비어있는 느낌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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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10-02 1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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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희 선생님께서 열심히 방송일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체험적 상상도 수필 소재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가늠해 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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