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회 신입회원 가입 안내 |

봄철에는 비가 반갑다. 비가 왔다 하면 연초록 잎새가 귀엽게 얼굴을 내밀거나 꽃봉오리가 방실방실 터지니까. 그런데 봄비가 반갑기는커녕 겁나고 불안한 것이 되고 말았다.
오대양 육대주 너른 바다로 흘러드는 방사능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은 마스크에 모자에 머플러를 감고 신체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방사능 함유량에 있어서도 매체마다 다 달라 어디에 기준을 맞춰야 할지 애매한 경우가 있다. 방사능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어서 일본 후쿠시마 현에서 생산된 시금치건,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서 출하된 시금치건 일단은 의심의 눈으로 신중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방사능 비가 종일 내리는데 나갈 수는 없고- 기실 교보문고에 나가서 구입해야 하는 책이 있었다. 사야 할 책이 한 두 권이 아니어서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고서점에 가면 정가의 30%에 살 수 있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청계천 뒷골목을 수 시간씩 헤매고 다녔다.
이런 곳도 서울특별시 맞나 싶었다. 동묘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동묘 뒷담을 끼고  한참을 걸었지만 전에 중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음식남여] [인생] 같은 비디오 테이프를 사러 동학들과 다니던 그 길의 옛 모습은 간데 없었다. 도시개발에 밀려 어디 외딴 곳으로 갔는지 영 사라져 버렸는지, 나름대로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던 청계천 뒷골목의 서정은 찾을 수가 없었다.

고서점을 찾아 걷다가 나는 문득 6.25  후에 북한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옷가지며 귀금속을 길바닥에 벌여놓고 팔던 그때 일이 떠올랐다. 시대를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케케묵어 구겨지고 낡은 옷 종류며 그릇들이 내가 찾는 책보다 더 많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몇 군데 고서점을 발견하기는 하였으나 빼곡하게 들어찬 중고 책들이 뿜어내는 짙은 냄새- 이건 단순한 곰팡이 냄새와는 다른 것이었다. 1시간도 채 못가서 골머리가 지끈지끈 쑤시면서 코가 맹맹해지고 재채기와 함께 으슬으슬 한기가 나기 시작했다.

책 사기를 포기하고 돌아서 온 게 엊그제다. 오늘은 아침 식사 후 곧바로 교보문고로 달려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비였다. 그 비는 인체에 극히 유해하다는 방사능 비였다.

나는 옛날 언년이를 따라 청주시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우리집 텃밭에 다니던 일을 회상했다. 하필 그 시점에서 또 기묘하게도 언년이와 상추쌈 생각이라니, 희한했지만 비오는 날의 단상(短想)이거니 했다.
낮에는 주로 상추쌈을 땄고 저녁 무렵에는 호박잎 아욱 등을 채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금 커 보이는 대소쿠리를 옆에 끼고 무심천의 듬성듬성한 돌다리를 건너 앞서 걷는 언년이를 허겁지겁 뒤따라가다 보면 무심천의 맑은 물 속에 꼭 모래처럼 보이는 모래무치가 물살에 떠밀려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헤엄이 아니라 이동이었을 것인데 다른 물고기에 비해 모래무치의 동작은 언년이의 걸음걸이에 뒤쳐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내 눈길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상추쌈을 따러 가는 날이면 나는 모래무치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가슴 설레었고, 상추쌈을 먹으면서도 모래무치의 해맑은 몸피와 모래바닥을 기는 듯한 동작들이 눈앞에 아른거리곤 했다.
상추쌈은 아버지와 어머니, 언년이를 포함한 형제들 모두가 즐겨 먹는 부식에 속했다. 어머니가 손수 담근 잘 익어 폭 삭은 된장에 참기름을 듬뿍 치고 싸먹는 상추쌈, 것도 아침 나절 무심천을 건너가 텃밭에서 직접 따온 그 맛은 상추쌈 이상이었다. 맛에 있어서는 명란찌게나 꽁치조림 못지않게 인기 품목이었다.

방사능 비가 겁나서 꼼짝없이 집안에나 들어앉아 있을 량이면 오늘 나에게 부과된 시간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 점에 대해서 잠시 고민을 해 보았다. PC도 어떤 날은 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냉장고를 뒤졌다. 언제 어떻게 누가 왜 무엇을 하려고 이게 여기 있는 것일까. 나는 메주가루 한 봉지를 꺼냈다. 마침 유기농 농법으로 재배한 고추가루도 다량 있어 엿기름물을 걸러 찹쌀 풀을 쑨 다음 한주소금으로 간을 맞추면 쌈장 제조는  완료될 것이었다. 해질 무렵에 쌈장 작업은 순조롭게 막을 내렸다.

"이게 무슨 냄새야?"
현관에 들어서던 딸애가 코를 큼큼 거렸다.
"엄마, 공부하기 힘드니까 이걸 했구나! 얼마나 먹는다고!"
온 집안에 메주가루 냄새가 진동했다. 갑자기 나의 어머니가. 청주시민의 사랑을 몽땅 받던 무심천과 순진한 언년이, 그리고 쑥갓 상추 호박 아욱 가지 근대 고추 등 각종 야채로 풍성한 식탁을 책임져 주던 우리집 텃밭이 그리워졌다. 야채 포기에 밤새 내려와 머물던 이슬방울이며 모래를 밀듯 움직이던 모래무치의 동작도.

대청호 언덕에 지금쯤 취나물이 한창일테지. 그곳이라고 방사능 비가  피해 갔을 리는 없겠지만 어머니 제사에 가면 상추쌈 대신 취나물이나 캐올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