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철(龍喆)이, 용철이 다정한 이름이다.

스무 해를 두고 내 입에서 그만큼 불려진 이름도 둘을 더 꼽아 셀 수 없을 것 같다.

20전후 처음으로 알게 되면서부터 그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여 나는 여태껏 가장 허물없고 다정하고 친근하고 미더운 이름으로 용철이 용철이를 불러온 것이다. 아! 그가 영영 가버리고 만 오늘 나는 그대로 그 이름을 자꾸 불러 보아 오히려 더 친근하고 다정하여 혓바닥에 이상한 미각까지 생겨나는 것을 깨닫나니 아마 내 평생을 두고도 그리 아니치 못하리로다. 용철이, 용철이, 서로 이역 하늘 밑에 서투른 옷들을 입고 손을 잡아 안 체하던 바로 그때부터 가장 가까웁고 친한 사람이 되었었고, 한 솥의 밥을 먹고 한 이불 속에 잠을 자고 한 책을 둘이 펴던 시절이 무던히 길었었나니 실상 벗은 그때 아직 문학이니 시니 생각도 않던 때 내 공연히 벗을 끌여들여서 글을 맛붙이게 하고 글재주를 찾아내려 하였던 것이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일생에 큰 죄를 지어 놓은 듯싶었다.

벗이 학원(學園)의 수재로 이름이 높고 특히 수리(數理)의 천재로 교사의 칭찬이 자자하던 때, 나는 작은 악마와도 같이 그를 꾀어내어서는 들판으로 산길로 끝없이 헤매이었던 것이다. 친한 벗이 끌어당기면 하는 수도 없었던가. 강남도 가지 않았느냐? 언덕의 송아지는 어매 팔아서 동무 사달라 한다지마는 내 벗 용철이가 수학(數學)을 팔아서 동무를 사놓고 보니 아무짝에도 못쓸 놈이었던 것이다. 「윤식(允植)이가 나를 오입(誤入)을 시켰다」는 말버릇을 최근까지 장난삼아 한적이 있으니 과연이냐? 벗아, 문학은 벗의 제2의적인 인생 부문으로 누리어도 좋았던 것일까? 더구나 벗이 이리도 일찍 가버리시니 긴 평생을 두고 걸어서 대성(大成)을 꿈꾸던 그때가 나의 한(恨) 중의 한이 아닐 수 없도다. 벗과 서로 시골살이를 하여 백여 리 길을 사이에 두고 가고 오고 하던 시절 벗은 시를 비로소 씹어 맛보시더니 불과 몇 날에 천여 명편(名篇)을 툭툭 쏟아내지 않았던가!

벗의 문학은 그 다음이라 치더라도 벗의 시는 완전히 그 고향살이 3, 4년 새에 이룬 것이다. 일가를 이루어 세상에 나가기까지 벗의 유일한 글벗이었던 나는 벗의 시업수련(詩業修練)의 도정(道程)을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백여 통의 편지 뭉치를 - 연서(戀書)같이, 보배같이 아끼고 간직해 온 뭉치 - 벗이 살아 계실 때나 가신 오늘도 가끔 풀어서 읽어 보아 아기자기한 기쁨을 맛보는 버릇이 있지마는 실로 한 시인이 커날 제 그이만큼 부지런하고 애쓰신 이도 있는가 하여 새삼스레 놀라는 것이다.

스스로 내놓으신 명편 가작을 그는 매양 사양하고 부족히 여기든가 하면 남의 시 한편을 붙들고 그렇게 샅샅이 고비고비 뒤집고 파 들어가서 완전히 알아 버리고 맛보아 버리던 그의 천재형의 머릿속에는 이 세상의 이른바 명시가 거의 다 한 번에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던 것이오. 그리하여 그의 시의 수준은 속에서 크고 남이 알 배 아니었으니 일조일석에 웅편(雄篇)이 쏟아져 나옴도 괴이하지 않은 노릇이로다.

오늘날 우리 시원(詩苑)의 명화요 또 유일한 시론가(詩論家)로의 지위를 점하여 그만한 담당을 쾌히 해내려 온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요 옛날의 수학을 아주 팔아 없앴음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내 속죄도 좀은 되었다 할까. 20 전에 어느 자리에서 문학을 경멸해 버린 일이 있었던 그대가 바로 얼마 전 10년을 더 살자. 시를 위해 10년을 더 살자 하지 않았던가. 음향에 귀가 어둡다고 못마땅해 하던 벗이 넉넉히 시귀의 음향적 연락을 한 번 캐어 보고 다 알지 않았던가. 자신 비정서적임을 한탄하시면서 어쩌면 그리도 넉넉히 지용(芝溶)의 《유리창》을 샅샅이 캐고 해석할 수 있었느냐. 아! 벗이 가신 뒤 또 그만한 일을 우리를 위해 해주실 이 어디 있단 말이냐. 오늘 우리의 시원(詩苑)은 한 시인의 죽음으로 두 가지의 크나큰 손실을 입은 바 되니 어찌 통탄 아니하랴.

혹은 모른다. 벗은 그 특이한 천재가 오히려 그의 창작을 괴로웁게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의 <떠나가는 배>와 <밤 기차> 두 편만 읽을 수 있더라도 그런 재앙은 애당초에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 한 편이고, 이른바 단명적인 구(句)가 아닌 것이 없었지마는 그리하여 오히려 시로써 아름다웠든가! 이 두 편의 시는 시인 용철을 말할 때뿐 아니라 통틀어 우리 서정시를 말할 때 반드시 논의되고 최고의 찬사를 바쳐야 될 걸작이라 할 것이다. 벗의 전기를 쓰는 배 아니매 이 두 편이 나오던 시절 시인이 겪은 고민이며 내지 생리까지를 말하기에는 나로서는 첫째 눈물이 앞서 못할 일이니 그만두기로 한다.

벌써 10년 전 일이로다. 우리는 서울로 지용을 만나러 왔었다. 지용을 만나서 셋이서 일어서면 우리 서정시의 앞길도 찬란한 꽃을 피게 되리라는 대망(大望)! 써 가상치 않았느뇨. 그때의 지용은 벗 용철과 같이 살도 변변히 찌질 못하고 한방에 앉아 있으면 그 마른 품으로 보든지 재주가 넘쳐 뵈는 점으로 보든지 과연 천하의 호적수로 여겨지던 때이다. (그뒤 지용은 뚱뚱해지고 용철 벗은 더 야위어만 갔다) 물론 지용과는 둘이 다 초면, 그 초면이 하루에 1년, 열흘에 10년의 의(誼)는 생겼던 것이다. 그 뒤에 두 벗이 얼마나 우리 시를 위하여 애쓰신 것은 다른 벗들이 다 아시는 바이다.

나는 막역(莫逆) 용철을 생각할 때 그 천생 포류(蒲柳)의 질(質)임을 이기고 어쩌면 그렇게도 굳세게 시에의 신념을 가질 수 있었는지 부러워하며 진실한 시의 사도이니라 여겨왔었다. 내 가끔 자기 시에 실망하여 지치려 할 때 벗은 과연 격려로 붙들어 주고 내 자유시의 이상(理想)으로, 한 시는 한 시형을 가질 뿐이라는 엄연한 제약을 세우고 안 씌어진 시, 형을 이루기 전의 시, 오직 꿈인 양 서리는 시를 꿈꾸고 진정 시인은 시를 쓸 수 없어도 좋으리라고까지 떠들지 않았던가. 벗은 내 허망된 소리에 열 번 지지를 표명하여 주셨으니 그리함이 나를 건져 주는 좋은 방법도 되었던가.

아! 어려서 한솥 밥 한 글방 친구가 나이 먹어가며 가장 가까운 시우(詩友)가 되고 보니 나는 이에서 더 행복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완전히 박행(薄幸)한 사람이로다.

아! 이 한이 크도다. 이 아침에 춘장(椿丈)을 뵈옵고 기쓰고 침착하려던 것이 끝내 흐느껴서 울음이 터지고 벗을 땅속 깊이 묻고 밤중에 산길을 거쳐서 내려오던 때 몹시 쏟아지는 눈물에 발을 헛딛던 일을 생각하면 벗이 가신 지 겨우 한 철이 지난 오늘 이러니 저러니 차분한 소리를 쓰고 있는 것이 내 자신 무척 우습고 지극히 천한 노릇같이 여겨진다. 일찍 처를 여의어 보고 아들도 놓쳐 보고 엄마도 마저 보내 본 나로서는 중한 사람의 죽음을 거의 겪어 본 셈이지마는 내가 가장 힘으로 믿던 벗의 죽음이라 아무리 운명이라 치더라도 너무 과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영결식이 끝난 뒤 지용과 단둘이 나중에 남았을 때의 호젓함, 남은 둘의 심사야 누구나 알 법도 하지마는 「이번은 거꾸로 가지 말고 내 먼저 갈 걸, 처음부터 거꾸로니 내 먼저 가지」 이런 문답을 한 일이 있다.

아무래도 좋은 말이다. 벗을 불렀자, 대답 없는 세상 아니냐. 온각 다 그릇된 세상 아니냐. 벗이 이제 시왕(詩王)이 아니시니 또 뉘가 「훈공(勳功)에 의하여 너를 원로(元老)로 봉하리요. 슬픈 노릇이다」아들을 가장 잘 이해하시는 어버이가 계시고 그 밑에 현부인이 계시도다. 벗아, 눈을 감으라. 세 아들은 삼태성(三太星)같이 빛나고 있나니 생전에 지용과 내 그다지도 권하여도 종시 거절하던 그대의 그 작품집이 이제는 유고집(遺稿集)으로 누구의 거절도 없이 우리의 손으로 째여 나오도다.

그대 그 몸 해가지고 무던히 많이 써 놓았던 것을 누가 알았으랴. 가장 가까운 부인도 놀라시지 않느냐. 캘린더 종잇조각에 끄적여 둔 것을 주워모아도 일품이요. 휴지통에서 건져 낸 것도 명편이로다. 태서명시(泰西名詩)의 역출(譯出)한 분량을 보고 누가 안 놀랄 것이냐. 아무튼 그대는 너무도 몸을 학대 혹사하여 아낄 줄을 몰랐느니라. 너무도 일밖에 몰랐는니라. 아! 그대의 가심을 서러워하고 통곡하고 말 것인가? 나는 그대 가심을 원망까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