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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언주 |
날짜 : 10-02-22 21:58
조회 : 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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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청으로 맹물 한 모금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달짝지근한 물맛이 감돌았다. 스님들과 차茶 모임이 잦은 지인으로부터 수미차를 대접 받았다. 새로 들인 차가 있다 하여 가까운 사람들과 둘러앉아 차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차가 몇 순배 돌고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는 빙그레 웃으며 다관의 찻물이 아닌 숙우에 남겨둔 물을 잔에다 부었다. 그리고는 찻잔과 입안에 남은 차향을 천천히 느껴보라고 하였다. 수미차水味茶였다.
차를 우린다. 다포를 걷어 내고 다기를 차린다. 차를 내는 것은 마음을 닦는 일, 심산계곡물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약수터에서 길어온 물을 끓인다. 주전자 속에서 미미한 물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거친 말굽소리로 들썩거린다. 묵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먼지를 턴다. 그러다 이내 한여름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잦아들면서 솔잎 쓸리는 바람소리가 난다. 물소리를 들으며 잡다한 세상일을 잠시 내려놓는다. 물이 순숙純熟 한다.
좋은 차 맛을 내기 위해서 물은 적당한 온도가 되어야 한다. 물이 너무 뜨거우면 찻잎이 익어 떫은맛이 짙어지고, 너무 식으면 차가 제대로 우러나지 않아 은은한 맛과 향을 즐길 수가 없다. 차를 마시는 것은 마음에 호수를 담는 일이다. 온전한 차 맛을 우려내기 위해 끓인 물을 숙우에서 한 번 더 뜸을 들인다. 들뜬 열기를 가라앉히고, 사발의 깊이로 물을 한 번 더 깊숙이 익힌다. 찻물에는 차를 내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마음을 다스리고 기다려야 찻잎이 풀어지고 맛과 향이 제대로 우러난다.
잘 익은 물을 조심스럽게 다관으로 옮겨 붓는다. 다관에 우전雨前의 싱그러움이 가득 찬다. 또르르 흘러내리는 찻물이 잔을 채우기도 전에 사방으로 향이 번진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온기가 번진다. 차의 길인 다도茶道는 몸과 마음에 쌓인 미진을 털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차는 성질이 차고 검소하여 석 잔까지는 마셔도 그 이상은 삼가 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 잔으로 맑은 수미차를 마신다. 말 그대로 물맛의 맹물차이지만 마시다보면 속이 씻겨내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미차라는 말 속에는 가난을 허물로 생각하지 않던 선인들의 풍류와 해학이 숨어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차茶가 떨어지고 차를 살만한 여유가 없으면 물을 끓여 찻물이 밴 다기의 차향을 즐겼다. 오랫동안 찻잔이 간직했던 향을 담은 수미차를 내어 놓고 사색과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니 찻잔에 밴 여향마저 우려내는 수미차는 마음을 다 비워내는 깨달음의 차이다. 항심恒心을 잃지 않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수미차의 향을 맡을 수 있어야 비로소 차 맛을 제대로 볼 줄 안다고 하였다. 찻잔에서 우러난 향기는 세월의 자취이다. 뜨거운 불가마 속에서 깨어지지 않고 생긴 잔금들이 세월을 머금고 있다가, 가난한 선비에게 마음의 여유를 선물 했다. 다기를 만들 때 잔 속으로 번져나간 도공의 숨결이 그려진 유열사이로 뜨거운 찻물이 잔에 채워질 때마다 그 향이 스며들었으리라. 찻잔 속에는 선인의 유유한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숙우에 남은 맑은 물로 다시 잔을 채운다. 빗방울이 고여 산비탈을 타고 흐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진흙을 뚫고 한 방울씩 다시 모인 물이 찻잔에 담겨져 있다. 찻잔 속에는 하늘이 들어 앉아있고 산이 녹아 있다. 비록 아직은 한 잔의 수미차의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은은한 향이 마음까지 와 닿는다. 수미차 한 잔으로 생활 속에서 오는 기쁨과 슬픔을 내려놓고 닫힌 마음을 풀어 놓는다.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어 본다. 잔잔하게 남은 온기가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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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0-02-22 2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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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주 선생님, 사이버상 수상하심을 축하 드립니다. 저는 뒤늦게 입회하여 선생님의 글을 뒤로 클릭클릭 해가며 몇편 읽은 바 있습니다만 대단하신 필력이십니다. 차 한잔에 이토록 많은 생각들이 담겨있다니, 경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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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10-02-24 18: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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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총회에서 뵐 수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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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2-22 2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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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주선생님,
찻물 거기에는 차를 내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고, 그리 우린 찻잔에는 하늘이 들어 앉고
솔잎 쓸리는 바람에 잡을 수 없는 구름만 떠도는데, 저는 언제 그 수미차를 맛볼 수가 있을까.
절로 그 염원이 깊어져 봄 밤을 스쳐온 그 향이 이 밤 제게도 오는 것 같습니다.
차향처럼 그윽하고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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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10-02-24 18: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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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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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2-23 0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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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이리 그윽하냐!
차향기가 여기까지 건너오는 기분이네. 茶禪一味라!
절에 가면 내 전생이 그럭저럭 절사람처럼 보이는지 주지스님께서 의례 차를 달여주신다오.
한 시간도 두 시간도 좋게 스님의 漢詩 들으며 도반들과 함께 즐기는 차향. 갖고 계신 좋은 차를 몽땅 풀어놓으시는 듯.
이언주선생님 멋진 글 감사드립니다. 정말 근사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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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10-02-24 18: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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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건강하시지요?
차향은 있는데 아직 문향이 배기에는 멀었습니다...잘 이끌어 주십시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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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0-02-23 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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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에는 고로쇠물을 마신줄 알았네요~ㅎㅎ
다도회 모임도 많고 ...우선 차라 하면 이선생님 표현처럼
순숙의 느낌이 듭니다. 차한잔에 인생을 음미하고
어쩌면 그속에 인생이 전부 녹아 있는줄도 모르겠지요
좋은글 잘 감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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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10-02-24 1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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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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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0-02-23 1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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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피니 녹차니 뭐 어쩌고 하는 잡다한 차문화로 얼룩진 가슴을 쓸어 내리는 개운한 맛이 바로 수미차의 그 맛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을 내모습도 떠올려 봅니다. 수미차 한 잔으로 오늘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며 인생을 봅니다. 아울러 수상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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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10-02-24 1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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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라는 글을 예쁘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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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인 |
10-02-23 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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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차 한 잔의 여유가 여기까지 느껴집니다. 차는 달이는 사람이나 마시는 사람이 마음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천천히 음하면서 마시는 차향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먼저 마신 차향과 맹물의 수미차 맛을 안다면 차의 본향을 아는 사람이겠지요.
은은한 향이 전해지는 맛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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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10-02-24 1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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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가 있다면...그건 좋은 사람과 마시는 차이겠죠.
그럼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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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10-02-23 1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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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차 한 잔을 위하여 길을 찾아나섰는지요.
지극한 길을 찾아가기 위하여 수미차의 은은한 향을 그리워하시는지요.
선계는 어디에 있으며, 독생하신 진리는
누가 이리 오라 손짓해 불러 귀한 깨달음 주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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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10-02-24 1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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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 다시 찻물을 끓여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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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0-02-24 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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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맛있고 맹물차도 달도다.
읽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이여, 건필하소서.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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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10-02-24 1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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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영광. 감사감사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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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10-02-24 0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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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의 차. 물이 끓는소리를 통해서도 여러가지를 떠 올리시고 찻잔 속에 우주를 담가놓고 바라다 보고 계시는 선생님의 눈과 귀, 생각들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숙우'라는 말 뜻을 알아보기 위해 사전을 찾아 봤더니 宿雨: '지나간 밤부터 오는 비'라는 설명밖에 나와 있지 않는데 맞는 말인지요. 그리고 '수미차'란 차(茶)의 한 종류가 아니라 '다향이 배어있는 용기에 끓인 물'을 뜻하는 것인지도 알고 싶군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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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10-02-24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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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숙우熟盂란 그대로 풀자면 '물을 익히는 사발'이라고나 할까요. 끓는 물을 한소끔 김을 빼 온도를 식히는 것이겠지만 '물을 뜸을 들이는 과정'이겠죠. 그리고 수미차는 다향이 밴 용기에 끓인 물이 아니고, 차는 성질이 儉하여 한 자리에서 석잔이상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마지막 잔을 숙우의 맹물을 부어 마신답니다. 그러면 속이 편안해 지고 건강에 좋다고요. 그런 심심한 이유말고, 차가 귀하던 시절 옛선비들은 가난을 슬퍼하지 않고 풍류로 즐겼다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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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승 |
10-02-24 2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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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산에 오르다가 계곡에서 두 손으로 떠먹는 수미차 맛도 좋더군요.
두 손을 모아 물을 뜨면 손가락 사이로 반쯤은 빠져나가고 손바닥에 몇 모금 정도의 물이 고이지요. 대개 그 물에는 신록의 그림자나 푸른 산빛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것을 훌훌 마시면 속이 개안합니다.
손도 수많은 빙열이 있으니 일종의 찻잔인 셈이지요.
숙우에 맹물을 부어 마시는 수미차 맛도 좋지만 손금을 우려내어 마시는 수미차 맛도 좋습니다. ㅎㅎ
차의 매력은 온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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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주 |
10-03-02 1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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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풍류를 아시는 분입니다.^^
천정이 내려앉은 수미차 맛이 산빛이 드리워진 수미차를 따르지 못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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