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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방주 |
날짜 : 10-01-13 20:21
조회 : 2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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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상에 막걸리가 올라왔다. 우리집 밥상에 반주가 웬 일인가? 아들이 퇴근길에 사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걸리 치고 병이 고급이다. 프랑스 코냑처럼 멋있다. 아랫도리는 초록색으로 동그랗고, 목은 길쭉하게 빠졌다. 초록 너머로 보이는 젖빛처럼 뽀얀 술이 고급스럽다. 가라앉은 찌꺼기도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윳빛 와인도 있나보다고 생각했다.
애주가는 못되지만 소주에 맛을 들이고 나서는 막걸리는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퇴근길에 술이라도 한 병 사오는 자식이 기특해서 한 잔 받았다. 대포를 마시듯이 벌컥벌컥 들이키지 않고, 와인을 마시듯 조금씩 입에 머금어 맛과 향을 음미했다. 향이 맑고 맛이 깨끗하다. 전통 막걸리의 단맛, 쌉쌀한 맛, 새콤한 맛, 톡 쏘는 듯한 청량감이 조화롭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막걸리 특유의 걸쭉한 맛은 좀 덜한 것 같았다. 전통 막걸리의 다섯 가지 맛을 다 살리면서 신세대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걸쭉한 맛은 감한 것 같다. 향도 단순하고 깊어졌다.
돌이켜 보면 나도 막걸리에 젖어 살던 때가 있었다. 자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막걸리를 자주 마셨다. 그러나 학생으로서 탈선할 수밖에 없는 어떤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굣길에 넘어야하는 배티고개를 거의 오르면, 인심 좋은 할머니의 주막이 하나 있었다. 어느 겨울날, 주막 앞을 지나노라니 할머니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연탄불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아궁이 앞에 나를 앉히고, 부뚜막에 묻어 놓은 단지를 휘저어 커다란 사발에 젖빛처럼 뽀얗고 따뜻한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술을 마시지 못한다니까 이 추위에 얼마나 배가 고프냐며 술이 아니라 밥이니까 얼른 마시란다. 주는 대로 받아서 벌컥벌컥 마셨다. 지금도 그 따뜻하고 상큼한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인심 좋은 주막집 할머니의 애틋한 인정까지 담겨 있었다.
그 후로는 출출하면 스스로 할머니의 부엌을 찾았다. 그러면서 차츰 막걸리 맛을 알게 되었다. 여름에는 갈증을 달래기 위해서, 겨울에는 추위를 잊기 위해서 마셨다. 토요일 오후엔 대포 한잔이면 점심을 걸러도 시오리 길이 거뜬했다. 우리 민족에게 대포 한 잔은 한 끼 끼니이기도 했다.
그렇게 배운 막걸리를 대학에 가니 숨어서 마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강의가 끝나 는 오후에는 으레 친구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잔을 들고 시대의 모순에 울분을 토했다. 젊음의 이상이 끝없이 추락하기만 했던 그 시대, 막걸리는 절망의 탈출구였다.
서른을 막 넘어 단양에서 근무할 때는 석연집이라는 인심 좋은 할머니의 막걸리집이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발걸음도 가볍게 석연집으로 퇴근했다. 묵은지와 두부를 구워 막걸리를 마시면서 묵은지 맛 같은 선배의 철학을 들었다. 이 시대엔 막걸리가 삶의 족적이었고 믿음의 무늬가 되었다.
지난 8월 아주 무덥던 어느날, 친구와 함께 용암동에서 상당산까지 3시간쯤 걸은 적이 있다. 갈증을 달래려고 산성동 어느 막걸리집에서 대포 두 잔을 마시고 희한한 경험을 했다.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성길을 내려오는데 온 세상이 모두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것이다. 길가의 나뭇가지, 사람들의 등산 모자에 보랏빛 별이 붙어 반짝거렸다. 정류장에 내려서도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지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보랏빛으로 흔들렸다. 그날의 막걸리에는 아무래도 순수하지 못한 성분이 섞였던 모양이다.
막걸리 맛은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전통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가장 막걸리다운 맛이 가장 좋은 막걸리가 아닐까? 누룩에 의한 자연 발효로만 향을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섣불리 와인 흉내를 내려고 인공 감미료를 첨가했다가는 막걸리도 와인도 아닌 것이 된다. 온 세상을 허영의 보랏빛으로 만드는 것은 겨레의 얼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김치가 제 맛을 지탱해서 기무치를 꺾었듯이 막걸리도 정체성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막걸리 특유의 오미(五味)와 누룩 향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살아있는 술이다.
지난 한 해 동안 히트 상품으로 막걸리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막걸리 전성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판매량도 위스키와 와인을 누르고 맥주 판매량에 육박했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양조 사업을 하는 이들이 막걸리에 눈을 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막걸리 붐을 타고 어느 경제 전문 일간지가 막걸리 품평회를 열었다고 한다. 별 희한한 품평회도 다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대보다 훨씬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출품된 막걸리도 다양했고 맛의 수준도 대단했다고 한다. 또 국내의 전통주조 기업의 경영자나 양조 연구자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한다. 막걸리 시음하는 사진을 보니 자못 진지한 표정이다.
약삭빠른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이름 있는‘포천이동막걸리’를 이미 상표로 등록했다고 한다. 문화를 상품화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자존감을 지켜나가는 한 방편이다. 최근에 한국 문화의 우수성이 입증되자 우리의 음식, 옷, 영화, 예술, 한글 등이 세계에서 환영받기 시작했다. 어떤 문화가 고급스럽게 보이면, 그 문화의 산물까지도 고급스러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세계로 뻗어나가는 막걸리 문화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자식 덕분에 모처럼 젊은날의 향수에 젖어본다. 한잔 더 마시며 맛을 음미한다. 五味를 잃지 않았으면서도 깔끔하고 상쾌한 맛에 마음까지 한결 들뜨는 기분이다. 이 정도면 그간 소주에 빼앗긴 술에 대한 미각을 되돌리고, 젊은 날의 낭만이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코냑'이나 '보드카'처럼 우리 술 이름인 '막걸리'가 지구촌 애주가들의 기억에 남는 단어가 되는 새로운 술문화시대가 바로 코앞에 와 있다고 해도 충분할 것 같다.
(2009.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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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0-01-13 2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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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생님의 말씀에 동감입니다
막걸리하면 누룩으로 빚은 걸쭉한 맛이
있어야 하지요, 그 맛을 음미한후 트림을 한번하고
깍두기를 한번 씹어야 제맛이 아닐까 합니다.
글세요...일본사람들이 제아무리 흉내를 낸다고 해도
꺼억하면서 김치냄새가 나는 그 독특한 향까지야 따라올수
있겠습니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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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0-01-14 1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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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철 선생님
누룩 균이 살아 있는 술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자연의 맛이 아닐까요?
거기에 깍두기까지 곁들이면 최고이겠지요.
요즘 세계로 나아가는 우리 문화의 하나로 막걸리를 보면서 기분 좋아서
졸필로 한 번 그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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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0-01-14 0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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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막걸리가 각광을 받고 있더군요.
그래서인지 독가집도 다시 활기에 넘치는 것을 봅니다.
아선생님은 나중에 음식관련 수필집을 하나 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구수한 입담으로 풀아가신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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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0-01-14 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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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회장님
음식도 중요한 우리 문화의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 글이 가는 길이 더디고 무뎌서 걱정이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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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1-14 0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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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주 선생님
막걸리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어려서 어머니 심부름으로 주전자들고 막걸리 사러 다닌 일 생각납니다.때로는 어머니가 직점 막걸리를 담그기도 하셨는데 술찌게미 맛이 무척 환상적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오래 전 청주 갔을 때 초등학교 동창 머시매들이 상당산에 가서 서울서 내려간 우리들에게 도토리묵에 막걸리를, 뭐라고 진탕 떠들다 왔는지 모르겠는데 그 역사적인 수다의 범인은 아무래도 막걸리가 아닌가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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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0-01-14 1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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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희 선생님
막걸리를 마시면 선생님 같은 연세에도 초등학교 친구를 '머시매'라고 부를 수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막걸리가 범인이 되겠지요. 그러나 막걸리를 마시며 협잡과 타산을 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막걸리 특유의 맛이 그걸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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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0-01-14 1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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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핸가 서울구치소 근무할 당시 천렵을 한 답시고 피리병과 그물등 낚시도구를 챙겨서 대성리 대교 밑에선가 천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고기를 좀 많이 잡아서 매운탕을 끓였는데 거기다가 수제비를 넣어서 아주 별미가 되었었답니다. 바로 옆 가게에 가서 포천 이동 막걸리를 함께 마시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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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0-01-15 07: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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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는 어떤 안주와도 잘 어울리지만 특히 민물고기 매운탕과는 더 잘 맞을 것 같아요.
우리 겨레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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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0-01-16 2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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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주 선생님의 글과 여러 선생님들의 댓글을 읽으니 마치 화기애애한 막걸리 잔치가 열린 것 같습니다.
막걸리에 유산균이 많다고 해서 요즈음은 젊은이들도 많이 찾고 있더군요. 지인 중에는 부부가 저녁마다 막걸리 한 대접에 반찬을 안주 삼아 저녁식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맛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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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0-01-16 2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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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화 선생님 안녕하세요?
부부가 함께 마시는 술이 얼마나 행복할까요. 막걸리를 마신 다음에는 냄새가 좀 나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더 푸근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문화는 모두가 솔직하고 생명력이 있어 보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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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0-01-17 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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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주 선생님 막걸리의 찬가 같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내 곁지기가 애주가인데 좋아하는 술 막걸리가 1순위입니다.
술울 못하는 저도 남편 덕분에 막걸리는 반공기 마시지요.
선생님의 글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막걸리처럼 선생님 글도 잘 읽히는군요.
선생님의 글 맛이 막걸리 같다고 하면?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읽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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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0-01-21 2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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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잠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지에서 술을 마셔 봐도 역시 우리 조국의 막걸리가 최고입니다.
보잘것없는 글에 대하여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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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10-01-21 2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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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일동 막걸리' 2~3주 전 며느리가 퇴근길에 사왔습니다. 친정 아버지가 가끔 마신다며 저도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저는 어떤 종류의 술이든 즐기는 편이 아니거든요. 아직도 뚜껑도 열지 않은 채 냉장고에 들어 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마셔보고 싶어졌습니다. 막내 아들녀석에게 "야, 오늘 저녁 이 막걸리 함께 마셔보자" 라 했더니 직장일도 바쁘고 학교 시험도 있어 공부도 하고 프로젝트가 있어 오늘은 안된다고 하여 주말에 마시기로 하고 다시 냉장고에 넣어 두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한국에 있을 때는 누룩 냄새가 풍기는 막걸리를 마신적이 있습니다. 이모님 께서는 한국 소주 (이름은 안동소주도 아니고 ???)의 무형문화재로서 전수자를 양성하기 위해 후계자를 선정했다고도 합니다. 낙원동 모처에 대형 사진과 함께 안내판도 나와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주말이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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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0-01-21 2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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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보 선생님 감사합니다.
막걸리는 신선한게 맛이 좋습니다. 오래 묵으면 맛이 변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최근에 새로 나오는 막걸리는 아주 오랫동안 보관해도 맛이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막걸리의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지요. 막걸리를 통하여 가족 간의 흐뭇한 저녁 한 때가 눈에 선하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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