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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임병문 |
날짜 : 10-01-12 20:24
조회 : 2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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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임 병 문
봄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 비가오고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날에도 열린 듯 닫힌 문에 빗장을 걸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온 기다림의 세월이 그 얼마이던가. 그는 이제 늙고 병든 몸으로 얼마를 더 형벌 같은 그리움 속에서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가.
철이 겨울로 가는가, 바람 찬 사직동 뒷길을 혼자서 가고 있다. 저만치에 오래된 한옥이 보인다. K와 헤어졌던 그 집이다. 그가 떠난 두 해만에 다시 이 집을 찾았다. K가 그립고 그와 먹던 청국장이 생각나서이다. 오늘도 손님이 많았다. 오래된 종가(宗家)의 묵은 장맛과 고택(古宅)이 풍기는 운치 때문일 것이다.
예전의 따끈한 아랫목에 앉아 방안을 둘러본다. 변한 것이 없다. 빛바랜 호랑이 그림의 민화, 봉창위에 걸린 세 개의 낡은 사진틀, 내 짐작이 맞다면 그 세 개중 양옆의 두개는 주인 내외의 미리 찍은 영정일터이고, 가운데 것은 이 집 아들의 학창시절 부모와 찍은 기념사진일 것이다. 닮고 잘생긴 소년의 손에 꽃다발이 들려 있어서다.
밥상을 물릴 즈음, 창 밖에는 희끗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주인 노파가 찻주전자를 들고 내 곁에 와 앉는다. 올해의 첫눈일 것이다. 바람에 대문이 삐걱거린다. 어디 선가 풍경이 우는 듯하다. 근처에 절집이 있었던가. 노파는 소리 나는 대문에 눈길을 주다가 이내 창호지문을 드르륵 닫아버린다.
“ 선생님, 오늘은 왜 혼자서 오셨는지요, 같이 오시던 분은 어쩌시고요.”
친구 K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다시 만남에 반가워서일까, 아니면 심란한 바깥 날씨에 마음이 허해진 까닭일까. 쉽게 터진 노파의 말이 오늘따라 은근하고 부드럽다.
“제 자식입니다. 중학교 졸업식 때 찍은 것이지요.”
사진 속의 소년을 가리키며 노파는 말을 이어갔다.
“내 나이 스무 살에 이 집에 시집을 와 온갖 고생 다해봤지만, 고생보다 더한 것은 자식 없는 설움이었습니다. 그 모진 세월 참아내며 천운으로 얻은 자식이 바로 저놈입니다.”
종부(宗婦)의 나이 서른을 넘겼지만 자식이 없었다. 별짓을 다해봤지만 모두가 허사였고 몸은 기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몽을 하고 짚이는 절을 찾아 100일치성을 드린 후 아이가 들어섰다. 기적이고 천행이었다. 대를 잇게 된 것이다.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고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일이요, 사람의 운명이라 했던가. 종손(宗孫)의 나이 네 살 때, 마루 끝에 놓인 주전자의 잿물을 아이가 식혜로 알고 마셨다. 그것은 빨래를 삶기 위해 뒤란의 양잿물을 툇마루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목젖은 타들어갔고, 혀는 입천장에 오그라 붙었다.
반벙어리가 된 종손은 낯을 가리고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후 곡절 끝에 아들은 지방의 어느 대학에 들어갔으나 결국 기숙사생활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언어문제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종손은 다시 말을 잃어버렸다. 세상이 무섭고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두문불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아들은 책상 위에 한 장의 쪽지를 남긴 채 집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엄니, 나 잠간 바람 쐬고 올테니 걱정마세요,’ 18년 전, 외동아들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남편은 아들을 찾아 전국 팔도를 미친 듯 돌아다니다 돈이 떨어지면 집에 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하다가 정신이 들면 다시 아들 이름을 부르며 온 세상을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십 여 년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이집에 밥집을 내었다. 아들이 못 찾을까 두려워 눌러앉아 차린 청국장집이였다. 이렇게 낸 밥집에서 노파는 낯 익어가는 손님마다 아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많이도 울었다. 종래에 손님들은 자기들끼리 아들의 사진을 가리키며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냐고’ 묻기에 이르렀다.
정성을 다해 청국장을 빚고, 가마솥에 쉼 없이 밥을 해냈다. 바빴다. 일에 지쳐서 꿈조차 꾸지 않고 쓰러져 자는 것이 어쩌면 행복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들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밥집을 이어가고 있지만, 기실 그 세월이 너무도 힘들고 괴로워 바쁨을 핑계 삼아 그만 잊어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밤마다 삐걱거리는 대문에 빗장마저 걸 수는 없었다. 열린 듯 닫힌 문을 한없이 내다보며 북풍한설의 긴 밤을 그리움으로 지새우기 일쑤였다. 노파는 그렇게 한 맺힌 세월 늙어 가고 있었다.
몇 년 후 다시 찾은 그곳에 밥집은 없었다. 고택이 있던 그 자리에 낯선 빌딩이 서있었다. 나는 발길을 돌리며 이제는 볼 수 없는 주인 노파가 그리워지고 집 나간 종손의 소식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멀리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친구 K가 보고 싶어진다.
K가 타국의 임지(任地)로 떠나던 그때가 새롭다. 그 날 우리는 노파의 그런 사연도 모르는 채 둘이서 청국장을 맛있게 먹고 헤어졌다. 그 후 친구는 먼 이국땅에서 풍토병을 앓으며 그때의 김치와 청국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나는 지금 그들이 보고 싶다. 그때의 노파처럼 나도 그들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면 되는 것인가. 그들도 나처럼 서로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 집 떠난 자식이 없고 돌아올 아들이 없어도 긴 겨울 밤 우리는 바람 든 무처럼 숭숭한 가슴으로 서로를 그리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삶이란 이처럼 구멍 뚫린 가슴을 채워주고 메워나가는 그리움과 기다림의 세월이 아니겠는가. 바람 부는 사직동, 지금도 그 길 위에는 잎이 지고 있을 것이다. 잎이 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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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0-01-12 2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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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집 사연도 애절하군요. 친구분도 임선생님을 그리워
하고 게시겠지요, 새해에는 그리움이 만나는 기쁨으로
축복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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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1-13 1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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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하옵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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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0-01-12 2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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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한 사연 잘 읽고 갑니다. 그리움의 타레를 풀고 즐거운 일들만 가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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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1-13 1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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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생님,
관심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많이 배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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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0-01-12 2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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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60년대에 들었던 라디오 연속극이었지요.
그 사연도 애잔했는데, 친구분 이야기도 애절하군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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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1-13 1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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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생님,
언제나 관심가져 주시고, 지켜봐 주시는
선생님께 황송할 따름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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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10-01-13 1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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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드디어 임병문 선생님이 신작수필을 올리셨군요. 좋은 글 담아놓고 가슴 떨리지 않으시는지요? 세월을 뒤돌아보는 선생님의 애절한 마음이 글 속에 그대로 보입니다. 이젠 저 역시, 지나 간 사람이 문득문득 그립기도 하고 한 해가 간다는 게 왜 그리도 아까운지 모르겠어요.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 자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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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1-13 1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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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생님,
언제나 부지런하시고, 열심이시고 또 친절하신 선생님께
항상 신세만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직 신인이라 무얼 잘 몰라서 그리 되었습니다. 차츰 나아 진다면 선생님께서는
덜 귀찮을 것입니다. 정말 죄송스럽고 고마울따름입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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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1-14 0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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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이 길다고 하나요? 선생님 이야기 무궁무진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기미를 느꼈습니다.
삼청동 인사동 고풍스럽고 콤콤한 동네 가면 청국장에도 그만한 사연이.
선생님.
좋은 글 잘 읽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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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재준 |
10-01-15 1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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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은 우리의 전통음식이자 맛과 영양이 뛰어난 음식으로서 과학이 증명해 주고 있듯 임병문님의 수필은 정말이지 구수하면서도 애절한 정감이 스며 있다고나 할까요? 글의 맛과 멋이 어우른 듯합니다. 좋은 글을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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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1-16 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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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희, 하재준선생님,
졸작을 읽어 주시고 격려와 용기를 함께 주시니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
한이 없습니다. 새해 두분 선생님 부디 건강하시옵고 많은 가르침 주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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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0-01-16 2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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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난 자식이 없고 돌아올 아들이 없어도 긴 겨울 밤 우리는 바람 든 무처럼 숭숭한 가슴으로 서로를 그리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
긴긴 겨울밤이어서 일까요. 이 글귀가 마음에 확 들어와 꽂힙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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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0-01-17 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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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한 글 잘 읽었습니다.
문장이 매끄러워 잘 읽히는군요.
단편 소설을 읽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여운이 남아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합니다.
청국장집의 사연, 선생님 친구분의 소식 등
새해에 좋은 글 많이 읽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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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10-10 0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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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하이고 죄송스럽습니다. 우연찮게 지난 글을 보다가 선생님의 귀한 말씀이 실린 댓글을 뒤늦게 보았습니다. 너무 너무 죄송스럽다는 말씀으로 용서가 될런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항시 건강하시옵고, 뵈울 날을 그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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