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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진화 |
날짜 : 09-11-03 15:41
조회 :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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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도 연인이었다
이진화
어릴 적 살던 한옥에는 부엌 위에 다락이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가끔 그곳에 올라가 이것저것 구경하길 좋아했다. 그곳에는 오래된 물건들과 마른 먹을거리가 보관되어 있었다. 안방에 붙어있는 다락은 한 두 계단만 올라가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공간이었다.
어느 날인가 방과 후에 일찍 돌아와 다락에서 놀다가 제법 큰 종이상자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색 바랜 편지와 엽서가 가득 들어있었다. 만년필로 시원하게 써내려간 글씨는 아버지의 글씨였고, 수신자는 어머니였다. 나는 의미도 모른 채 몇 날 며칠을 다락에 올라가서 편지를 읽었다.
육이오 전쟁으로 온 나라가 전쟁터였던 1950년 대 초반에 만난 젊은 연인들에겐 오로지 편지만이 소통의 수단이었을 터, 경상도 시골 출신의 수재였던 아버지는 미인으로 소문난 서울 처녀 어머니에게 장편 소설 분량의 편지를 써 보내셨고 결국 두 분은 결혼에 성공하셨다. 동갑내기 23세 선남선녀의 결혼식은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다락에서 부모님의 결혼사진과 가족사진을 꺼내보는 것은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한복을 입고 화관을 쓴 어머니의 결혼사진을 보며 나는 꼭 예쁜 드레스를 입고 멋진 결혼식을 하리라 꿈을 꾸었다.
그러나 불가사의 한 일은 45년을 부부로 살아오신 부모님이 어떤 경우에도 살가운 대화를 나누거나 정다운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젊은 부모님의 맏딸로 태어나 45년 동안 동행했던 길을 되돌아보면 그 시절의 장면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토막토막 돌아간다. 슬프고, 두렵고, 외롭고, 조마조마하던 기억들과 설레고, 따스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장면이 빠르게 오버랩 된다.
제대를 한 후 대학생으로 복학을 하고, 공무원이 되어서도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여간해서 보기가 어려웠다. 격동기에 요직을 거치며 아버지의 이름은 점점 높아졌지만 책장에 책만 늘어날 뿐 집안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사남매를 키우느라 늘 바쁘고 고된 중에 30대와 40대의 고개를 가파르게 오르셨다. 아버지께서 40대에 해외근무를 하면서 어머니의 활달한 성격은 꽃을 피웠다. 50대, 60대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미모를 되찾으신 듯 했다. 그 시절엔 정말 즐겁고 평안하셨을까.
은퇴 후에 고향에 내려가서 단란하게 살아보고자 했던 아버지의 꿈은 도시 성향인 어머니와는 많이 달랐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10년이 되는 올해 어머니는 78세가 되셨다. 어머니께 아버지와 살았던 45년 중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여쭈어보았다. 생각에 잠겼던 어머니는,
“너를 낳았을 때 아버지가 참 기뻐하셨어. 그리고 너희 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내 자신이 뭔가 큰일을 해낸 것 같이 기뻤단다. 대위로 제대 하고 복학을 해서 야간으로 직장을 다니며 서울 법대를 졸업했으니 얼마나 대단하냐. 아이가 셋이나 되는 아빠가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론 즐거웠던 기억이 별로 없어. 젊은 나이에 가장이 된 네 아버진 늘 바깥일에만 치중했었지. 이날 이때까지 참 힘들고 외로울 때가 많았단다. 네 아버지가 성질이 냉정하잖니.”
올해 들어 자꾸 이곳저곳 아프시다는 어머니는 옛일을 잊으신 게다. 오랜 세월 왜 좋은 시절이 없었을까마는 ‘이제 재미있게 마음 편히 살아보자.’던 아버지가 먼저 황망히 떠나신 데 대해 내심 화가 나신 모양이다. 그래서 서운했던 일들만 떠올리며 그리움을 밀어내시는 게 아닐까. 당신이 바로 그 많은 연서의 수신자요, 영민하고 전도유망했던 청년의 유일한 흠모 대상이었다는 것을 잊을 만큼 가슴에 깊은 슬픔을 담아놓고 지내시는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어머니의 그와 같이 무덤덤한 표정은 자식들 때문에 서운하고 마음이 아플 때 더 두드러진다는 걸 요즈음 들어 깨닫고 있다.
최근까지도 환하던 어머니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은 사랑의 등불이 촉수가 낮아지고 외로움의 장막이 드리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남매는 왜 ‘어머니 우리집에서 함께 사세요.’라고 선뜻 말하지 못할까. 외국에 삶터를 정한 세 아들, 제 식구들과 살기 바쁜 딸 하나... 일주일에 한 번 어머니를 뵙고 용돈을 드리며 건강과 생활을 살피는 것으로 자식 노릇을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참 안타깝고 부끄럽다.
문득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사랑받고 사랑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본다. 아, 아무도 푸르른 젊음으로 물 차오른던 여자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칭송받던 그녀가 지금 어디 있는지 묻지 않았다. 멋진 청년의 사랑스런 연인이었던 존재를 모두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에 목마른 늙으신 어머니도 한때는 보석처럼 빛나는 연인이었다. 어머니도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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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09-11-03 1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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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밤이 다하면 질터인데
그리운 내 님은
어딜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터인데
손가락 마다
무영실 매어주던 곱디 고운
내님은 어딜갔나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고운 내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전에
그리운 내님도 돌아오소
"어머니도 한때는 보석처럼 빛나는 연인이었다."하시며 눈시울을 적시오니
불현듯 박은옥의 '봉숭아'가 맴을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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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09-11-03 1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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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화선생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늘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전에 유희남선생님의 아버지도 유씨문중의 알아주던 수재였다고 하던데,
이선생님의 부친도 정말 수재셨군요.
모친의 고운 자태는 언젠가 올려주신 사진에서 본것 같습니다.
어머니 살아계실제 효도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몰랐는데, 막상 모친을 여의고 보니 후회가 사무쳤습니다.
무엇보다도 말벗이 되어 드리는것, 자꾸 옛날을 여쭈어서 회상하게
해드리는 것, 만난것 잡숩고 싶으신것 해드린것 이상 없다고 봅니다.
이번에 어느 잡지에서 '소인없는 편지'를 써달라고 해서 저도
어머니를 그리는 글을 한편 편지형식으로 써보낸 적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아련하고, 그러면서도 조금은 쓸쓸하고 애달픈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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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09-11-03 2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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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면서도 재미있는 단편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위의 댓글을 다신 임회장님의 말씀에 동감입니다.
'아름답고, 아련하고, 쓸쓸하고, 애달픈 글'
이제 어머니의 외롭고 쓸쓸함을 덜어들여야 할 일이 숙제 같군요.
저도 그런 친정어머니를 마지막 제가 모시고 살았지만
가시고 나니 그래도 후회만 남더라구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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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09-11-04 0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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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아리는 추억, 그것은 누구에게나 품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림움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유난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짙은 이진화 선생님의 모습에서 '효녀'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토록 어머니를 더 생각하게 되는 것도 그 나이에 이른 까닭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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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09-11-04 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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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서 이제 초겨울을 느끼게 합니다. 올해는 더 일찍 찾아온 첫추위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더 쓸쓸하고 황량한 들판을 떠올리게 되고 돌아가신 분들을 그리워하게 되고 옛생각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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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09-11-04 2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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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수재가 밤마다 그리면서 써내린
연서의 수신자였다는 표현이 아주 멋집니다
이진화 선생님은 수재와 미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라서 두분의 두가지 장점을 다 물려
받으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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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11-05 1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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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다름아닌 우리가 어머니를 떠난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곁에 계시든, 차디 찬 찬 곳에 누워 계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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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희 |
09-11-19 0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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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동안 곁에서 지켜보며 모든 딸들이 이진화 선생만 같으면 오죽 좋으랴 싶으리만큼, 어머니에게 지극정성이어서 늘 부러웠습니다. 이제 나도 자꾸 쓸쓸한 마음만 드니, 어머니 심정이 이해되는군요. 아름답고 밝은 어머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다니 마음이 언짢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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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09-11-25 2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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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이 생신이었는데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축하해드렸더니 즐거워 하셨습니다.
한 선생님은 속깊은 따님을 두셔서 든든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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