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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동호 |
날짜 : 09-10-15 20:47
조회 : 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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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등정(登頂)
정동호
나는 지리산에 오르면 늘 마음이 평안하고 새 힘이 솟는다.
지리산은 언제나 나를 아늑하게 품어주기 때문이다. 나이를 생각하여 무리하지 말라는 친구도 있고, 뭐 하려고 그렇게 자주 가느냐고 묻는 이도 있다.
그동안 150여회를 다녔지만 그래도 지리산 가는 날은 아침부터 항상 마음이 설렌다. 거기에 오르면 나는 큰 바위도 되고, 돌도 된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한 그루 나무요, 이름 모를 한 포기 풀꽃도 된다. 일상에서 벗어나 단 하루만이라도 자연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삼남을 한 눈에 내려다보며 대자연 앞에 겸손을 일깨운다. 그래서 나는 이 산을 자주 찾는다.
지리산은 영. 호남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요, 산자락 아래 사는 3도 5개 시 군 주민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되어왔다. 공원둘레 320km의 광활한 산괴, 각종 동식물의 낙원, 생태계가 살아 있는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산, 국립공원 제 1호이다.
계곡마다 능선마다 봉우리마다 각기 제 멋이 있다. 갈 때마다 맛이 다르고 철따라 모양과 느낌이 천천만만이다. 그래서인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비가 잦고 구름과 안개가 들락날락 변덕이 심한 산. 변절기에는 바람도 자주 불고 기온 차가 심하여 준비를 소홀이 하면 생고생을 하기 일쑤다. 여벌옷이며 충분한 물과 간식, 여름은 비옷, 겨울은 눈과 빙판에 대비한 장비 등 꼼꼼히 챙겨야 할 것도 많다. 큰 산에 대한 예의다.
구름 낀 날은 운해가 아름답고, 맑은 날은 푸른 하늘과 시야에 와 닿는 광활한 경관이 좋다. 하얗게 눈 덮인 겨울산은 저벅저벅 걷는 짜릿함이 있고,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계곡이 봄 햇살을 받아 터져 내릴 때는 힘찬 물소리가 잠든 영혼도 일깨운다. 계곡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폭포며 명경보다 더 맑은 물이며,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은 한여름 도심의 폭염도 잊게 한다.
붉게 물든 지리산의 가을, 1900고지에서부터 등고선을 그리며 점점 내려오는 단풍 띠는 색동저고리마냥 아름답다. 온 산이 눈부실 만큼 장관을 이룬다. 어느 능선, 어느 계곡 할 것 없이 훨훨 불이 탄다.
산이 높은 만큼 깊은 계곡도 많다. 등산로를 벗어났다가 조난당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뉴스거리가 된다. 위험한 길도 많고 무서움 증이 나는 계곡도 있다. 그 때문인지 지리산은 민족의 수많은 애환도 보듬고 있다.
봉건사회의 가혹한 수탈에 못 견딘 불쌍한 선민들, 세상 난리를 피해 숨어든 한 많은 백성들의 산이다. 세상을 등진 선비들도, 양반집 머슴과 주인의 딸도 함께 숨어 든 산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가하면 동족상잔의 아픔도 안고 있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 사건 이후 모여든 2만여 명의 빨치산과 군경토벌대간의 혈투로 피비린내를 뿌리며 계곡을 붉게 물들인 산이다. 대원사 계곡이나 거림골, 뱀사골, 달궁골, 의신골, 피아골 등을 오르다가 ‘까악 까악’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이름도 없이 묻혀있을 수많은 희생자들의 넋이 떠올라 등살이 오싹해 지고 민족의 아픈 역사들이 꿈틀거리기도 하는 산이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이 산에 피를 뿌렸을까? 이념은 무엇이며 사상은 무어라 말이더냐.
천왕봉을 오르는 당일코스는 서너 곳이 있다. 나는 그 중 산청군의 중산리-칼바위-법계사 계곡을 많이 찾는다. 5,3km의 짧은 거리가 암시하듯 오르는 길이 시작부터 매우 가파르다.
정상까지 오르는 등산로에는 0,5km마다 세워진 이정표 열개가 있다. 칼바위, 망바위, 로타리 산장을 지나 법계사가 떠받드는 거대한 암반까지 가는 동안 이정표 일곱 개를 훌쩍 지난다. 15도 비스듬 누워있는 이 암반을 마당바위라 부르는데 나는 여기서 자주자주 지나온 길과 남은 여정을 비교해 본다.
이제 천왕봉까지 남은 길은 10분의 3, 어쩌면 내 인생의 현재 시점이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경사진 바위에서 거꾸로 누워 하체에 쏠린 피를 머리 쪽으로 역류시키며 다리의 피로를 풀어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오로지 정상만을 향해 숨을 헐떡이며 숨고르기도 못해보고 외길만 타지 않았던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헤아려보기는커녕 등산의 묘미도 느껴보지 못하고 오르다보니 천왕봉이 어느덧 눈앞에 들어와 있다.
스물한 살에 공직에 첫 발을 들여 물러날 때까지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 대소사도 멀리하게 됐다. 세 아이의 양육과 가정의 모든 일도 아내에게만 맡기고 살아왔다. 정신없이 살아온 공직생활 39년이 지리산 구름만큼이나 바쁘게 흘러가 버린 것만 같다. 그러나 아직도 십에 삼은 남아 있지 않은가. 얼마 남지 않은 정상을 바라보며 이제부터는 여유를 즐기며 가야 하리라.
천왕봉 정상에 서면 가슴이 확 트인다. 일천 미터가 넘는 20여개의 준봉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주능선 외에 15개의 지능선과 계곡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광주 무등산과 월출산, 남해바다도 지척에 다가온다. 산줄기 끝자락마다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며 가지런한 논밭들도 아련하게 눈에 스친다. 가히 청학(靑鶴)도 살 만 한 산이다.
지리산에는 청학동이 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청학이 사는 이상향. 그 이상향을 찾아 지리산에 든 사람들이 많았다. 신라 말 최치원이 지리산을 다녀 간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고려조 이인로도 무신의 난을 피해 은둔하려고 구례화엄사를 거쳐 화개동천을 누볐으나 청학동은 끝내 찾지 못했다지 않은가. 조선조 김종직, 김일손, 조식 등 유명한 대 학자들도 뒤를 이었지만 아직껏 못 찾았다고 한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청학동이 10여 곳 넘는 것을 보면 지리산 골짜기 모두가 청학동임에 틀림없다.
푸른 학이 너울너울 까마귀 떼를 쫓으며 날아간다. 에덴동산의 순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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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09-10-16 0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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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호선생님, 산 메니아시군요.
지리산 등정을 150회나 하셨다니 정말 놀납습니다.
글을 읽어보다도 지리산 이곳 저것을 훤히 꿰고 계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지리산(智異山)은 다분히 철학적인 이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만큼 보는 사람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다른 느낌과 감동을 선사하는것 같습니다.
저는 10차례 같은 코스 서너곳만 다녀온지라 지라산 이야기는 늘 신기하기만
합니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출판기념회때 건강한 모습으로 뵙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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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호 |
09-10-16 0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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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회장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계셨지요.
보내주신 책은 잘 읽었습니다만, 감사가 늦어 미안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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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09-10-16 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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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해 마지않습니다.
지리산의 최치원 선생님이라고 해도 괜찮을것 같습니다
대단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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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09-10-16 1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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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십니다. 저는 광주교도고 근무시 산악회에 가입하여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산을 좋아하는 사나이라고 자부하며 삽니다. 그당시 남해금산등 여러곳을 두루 다녔으니까요 어느해 여름휴가때는 해남 두륜산 월출산을 한꺼번에 다녀온 적도 있답니다. 좋은 글 그리고 공감이 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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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호 |
09-10-16 1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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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철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정선생님은 늘 좋은 글을 그렇게도 많이 잘 쓰십니까.
임재문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하늘만 푸르면 지리산 생각이 절로 날만큼 매니아가 된 것 같습니다.
함께 등반 하시던 분들이 차츰 떨어지는 걸 보면 다들 체력이 달리나 봐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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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09-10-17 0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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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묻힌 시대적 불행과
자연의 변화무상한 사계를 한 눈에 보는 듯 잘 감상했습니다.
저는 아직 그 곳을 가보지 못했습니다.
빨치산, 뱀사골, 어느 해인가 폭우로 인한 많은 인재난을 떠올릴 뿐이었습니다.
유난히도 빨갛게 물들이는 지리산의 수목들은 그 많은 사연을 품고
사계절을 견뎌낸 끈기력에 더욱 곱게 물들이는 듯 합니다.
올해는 여느 해에 비해 단풍이 곱다고 하니 달려가 보는 마음이 바빠집니다.
정동호 선생님의 올 가을도 더욱 곱게 장식하시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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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호 |
09-10-17 2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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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태 선생님! 감사합니다.
요즘은 서울 분들도 지리산을 많이 찾습니다. 언제 지리산 등산 계획을 세워 보시지요.
제가 좋은안내자가 되어 드리죠. 추석 하루 전날 (1일)과 6일에도 다녀 왔구요, 19일 월요일에도 지리산을 다녀 오려 합니다. 붉게 물든 지리산이 눈에 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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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09-10-18 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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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호 선생님 대단히 고맙습니다.
경험자를 따르는 일은 생에 있어 특별한 행운이라 할 것입니다.
특히 산행에 있어서는요.
'지리산은 정동호 선생님 계시다!'
그 굳건한 믿음에 날 잡으면 등산화 끈만매고 달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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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09-10-18 0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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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리산 정상에 한 번, 지리산 언저리에 서너 번 다녀왔습니다.
언저리라 함은 함양, 남원, 산청, 거창 등을 돌아다닌 것입니다.
그것만 해도 참 좋던데 150번을 오르며 속속들이 살핀 지리산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요.
요새는 둘레길을 열어 걷기를 한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는 아니더라도 지리산 둘레길은 한 번 가봐야지 마음 먹고 있습니다.
다녀온 지인이 그러는데 걸으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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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호 |
09-10-18 1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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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화 전 회장님! 지리산은 평생을 돌아도 다 못가보는 곳이라 감히 말씀 드려야겠지요.
이름 난 곳도 통제 된 곳이 많고, 휴식년에 들어간 곳도 많지요.
저의 경우 가면 갈수록 더 가보고 싶은 곳이지요. 그 수많은 계곡과 능선들, 봉우리와 봉우리들 영혼 깊은 곳에 손짓하는 산이라 말씀 드리고 싶군요.
둘레길이라도 더러 시간을 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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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09-10-25 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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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여름 연재 중인 '국립공원 산행기'를 쓰려고 4박 5일로 지리산을 단독 종주하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백무동서 화엄사까지였지요. 지금은 없어진 뱀사골산장, 반야봉, 노고단 정상, 화엄사의 밤은 다시는 못가볼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최진실의 부음을 들었구요.
제석봉서 바라보던 반야봉의 석양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기억을 생각게 하는 정 작가님의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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