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이렇게 붙여 놓고 보니 무엇을 하는데 44분씩이나 끄느냐는 의문부터, 달리기나 등산, 수영같은  운동기록 아니면 무슨 물건이나 음식을 만들어 내는 달인이 걸리는 시간을 측정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것 같다. 그런데 이게 좀 색다른 기록이다.

내가 다니는 헬스장에서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런닝 머신 위를 걷는 시간이다. 정확히 말해서 이 여인은 44분 44초가 되면 걷기를 끝내고 내려 간다. 나는 보통 50분 내지 60분을 채우고 내려오는데  어느날인가부터 바로 내옆에서 이 여성이 걷다가 내려가기에  무심코 얼마나 걸었는지 얼핏 계기판을 보니 44분 44초에 정지되어 있는게 아닌가. 다소 희안한 생각은 들었지만 우연이겠지 했는데 그다음날도  또 그다음날도 44분 44초만 되면 머신을 정지시키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보통 4라는 숫자는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3 이라는 숫자도 그렇고 어떤 사람은 9자도 싫어하는 모습도 본적이 있는데  40분을 걷던지 아니면 45분을 채우던지 할 일이지 얼마나 4자가 좋기에 44분 44초를 맞추는지 이 별난 여자에 대하여 묘한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몸매가 약간 두리뭉실한 것을 빼고는 눈도 크고 콧날도 오똑하게 미모를 갖춘 여인이라서 그런지 내가 운동하는 모습을 자꾸 쳐다 보니까 다른 회원들은 내가 이 여인에게 딴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쨋든 더 재밌는 것은 이 여인의 운동 습관을 관찰해 보니까 기구 운동을 할때도 10회를 채우지 않고 9 회만 한다던지  아니면 13 회에 끝내는, 남들이 별로 좋아 하지 않는 숫자에 일부러 맞추는 특이한 버릇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코치한테 배웠는지 운동하는 자세가 비교적 정확하고 진지한 태도로 보아서 장난하는것 같지는 않아 점점 흥미나 호기심을 넘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는 잠시 쉬는 동안에 이 여인에게 말을 붙일 기회가 생겼다. 나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빼서 건네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동안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하필 남들이 싫어하는 숫자에  맞추는 일을 즐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더니  “유심히도 보셨네요. 제가 즐기는것 같았나요 ” 하면서 깔깔대며  웃는 것이었다. 물론 그날은 아무소리도 들을수 없었는데  얼마후 뜻밖에 이 여인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게 되었다. 시간이 되시면 저 술한잔 사주실래요 하는것이 아닌가. 두말할 필요없이 나는 헬스장 1층에 있는 호프집으로 모시고 갔다. 언제 조사했는지 내가 수필을 쓴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술한잔 나눌 사람은 될것 같다고 생각한것 같았다.

여인은 그동안 살아온 인생여정을 풀어 놓는데 한마디로 팔자로 따지자면 그렇게 기구할 수가 없는 여인인것 같았다. 뉴스에도 났다지만 행복했던 결혼생활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하여 남편과 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어린 아들과 둘이 살아 남게 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됬다는 것이다.

두번째 새출발을 했으나 하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혼하게 되었고 전남편의 보험금등 얼마 남은 돈으로 이것 저것 해보았으나 하나도 되는게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용하다는 점쟁이들을 찾아 다니며 의지하게 되었는데 한결같이 살과 마가 끼어 있어서 이승에서는 뜻해 보았자 하나도 되는게 없는 운명을 타고 태어 났다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닥칠때마다  당연히 잘 안될것이라는 체념을 먼저하게 되었고 모든것을 팔자 소관으로 돌리는 운명론자가 되어 버렸다는것이다. 그러던중 청천벽력과 같이 아들이 골수암에 걸려 결국은 가슴에 묻는 순간 더 이상 잃을 것도 버릴것도 없는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아들 곁으로 가려고 약까지 먹었으나. 용한 분들의 말씀처럼 그것마저 뜻대로 안되더라는 것이다. 

지금도 자기는 사는 의미를 못 느낀다고 했다. 그런데 그냥 잠이 들다가 멍하니 눈뜨는 아침을 맞게 되고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나오고 그깟 팔자가 무엇인데 이렇게 원수처럼 괴롭히냐는 반감이 생기고 어차피 미련도 없으므로 그냥 가버리고 싶지만 이왕 망가질 바에는 업보라도 뒤집어 버리고 가겠다는 오기가 생기더라는 것이다.

나는 여인의 말을 들으면서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기분을 눈치챘는지,선생님의 눈길을 보는 순간 아직 내가 여자로 보이기는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더라는 말로 분위기를 슬쩍 바꾸는 바람에 숨겨진 속마음을 들킨것 같아 얼굴이 약간 붉어졌지만 솔직히 말해서 공연히 물어 본것 아닌가 하는 무거운 부담감이 생기는 것이다..

여인은 자기로서 쉽게 할수 있는것이 사람들이 재수 없다는 숫자를 골라 거기에 일부러 맞춰보며 즐기는 것이 도전하는 재미도 있고 해서 남이 보기에는 이상할지 모르지만 의식적으로 하는 짓이라고 했다.

나는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일어서 보려는 안타까운 모습도 느꼈지만  여인에게 그렇게 해서 팔자를 얼마나 뒤집었는지 물었다. 아직 한참 도전중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은 없지만 우울증은 좀 없어진것 같고 남들과도 지금처럼 어느정도는 대화도 하게 됬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인의 이런 행동들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일시적인 충동에서 생긴  오기일뿐 여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수 없을뿐더러 결국은 영혼마저 황폐해질 뿐일 것이다. 설사 순간적으로 성취감도 얻을수 있고 쾌감도 느껴볼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가여운 중생이고 길잃고 헤메는 어린양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나는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 그런 엄청난 고통에서 헤어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니 종교에 의지해 보는게 어떠냐고 했으나 여인은 그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많이 들었던 말이었는지 별 흥미를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다가 나는 이왕 숫자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팔자라는 것은 숫자로 8 이라고 쓰는데 이 숫자는 나오고 들어가는 곳이 없이 평생을 뱅글뱅글 돌게 되어 있어서  운명론자들은 헤어날 수 없는 팔자로 보지만 이 숫자를 가위로 싹뚝 잘라 버리면 직선으로 활짝 펴져 화살처럼 어디든지 날아갈수 있어서 예전의 지긋지긋한 팔자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팔자로 태어날 수 있을것이라는 말로  위로를 해주었더니 그 말에는 빙그레 웃는다.

그런데 요 며칠 이 여인이 보이지를 않는다. 집도 모르지만 찾아갈 입장도 아니고 남자한테 속사정을 이야기 한것이 어쩌면 마지막으로 송별연같이  생각하고 한것은 아닌지 방정맞은 생각도 드는데 제발 그런것 말고 가벼운 감기라도 걸린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시 내옆에서 44분 44초를 걷고 내려가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러나 만약에 자기를 알게 된 내가 부담스러워서 종적을 감추기로 한것이라면 어딜가더라도 한번 살아 보시요라고 전하고 싶다. 그리고 무모하고 황당한 도전 보다는 내가 말한것 처럼 8자를 가위로 싹뚝 잘라내는 기지를 발휘하는 그런 도전을 해봄으로서 스스로 고통의 질곡에서 벗날 수 있게 되어 이 여인에게 더 이상의 불행은 없어야 할텐데 하고  꼭 그렇게 되기를 비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