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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창식 |
날짜 : 09-07-19 14:21
조회 : 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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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린 비
그녀는 토요일이면 모이는 동아리에서 알게 되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단언컨대 '모종(某種)의 에트바스' (etwas, 관계를 뜻하는 독일어. 영어의 something. 클럽회원들 사이에 통용되었다.)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회합이 끝나면 같은 차를 타고 가긴 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手順)이었다. 이야기래야 전공하는 언어와, 음악, 청춘의 꿈과 방황, 뭐 그런 내용이 아니었겠는가.
특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긴하다. 함께 좌석 버스를 타고 가다 그녀가 한 정거장 먼저 내리고 요금은 내가 내마고 하였다. 다음 정류장이 가까워 오자 불안해졌다. 여차장에게 100원을 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80원을 거슬러주었다. 우려했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20원(그때의 요금)을 되돌려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가 나와 함께 차를 탔었다는 것을 복원해 낼 수 없을 테니까.
어느날인가 또 한 번은 낮부터 내린 비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밤이 되어 홈빡 젖어 함께 차를 탄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날따라 서로 침묵하였는데, 스쳐 지나가는 밤거리를 배경으로 차창에 비친 그녀의 옆 얼굴이 왠지 생경하게 보였다.
"이상해요... 이처럼 비가 심하게 오는 날에도 나도 모르게..."
주저하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짐짓 우울한 목소리.
"창밖을 보며 좀더 비가 왔으면 하고 바라는 나 자신을 보아요. "
그녀의 목소리가 생기를 띠었다가 다급해졌다.
"사랑도 마찬가질 거라는 생각.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그 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저...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녀는 말을 맺지 못하며 얼굴을 붉혔다. 목소리가 잦아들고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 창을 통해 스쳐지나가는 거리 풍경이 음화(陰畵)같았다. 그녀는 목적지에 다다른 예언자(豫言者)처럼 피곤해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 속으로 들어간다고? 아, 그때 내가 알아챘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사랑에 대하여 담론(談論)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다. 여자의 부끄러움을! 그녀는 여자로서 일생 동안 한번 하기도 힘든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를테면 내게 신탁(神託)을 준 것이었다. 마음 속에 바라마지 않으면서도 한편 듣기를 꺼려했던! 비밀을 엿본 나의 마음은 무거웠다. 나는 끝 모를 나락(奈落)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그녀와의 관계도 -옛날 같지가 않았다. 그녀에게서 변화의 조짐이 느껴졌다. 어느날 부터인가 토요 회합에 잘 나오지 않았고, 나왔다 해도 나와 함께 차를 타지 않았다. 그녀에게 매번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녀를 알게 된 지 3년쯤 지난 시점이었고, 그 해 말 입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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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승 |
09-07-20 1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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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소한 이야기지만 인생의 기로, 엇갈림, 빛나는 모서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배경에는 조금 어두운 톤의 재즈가 깔려야 제격일 것 같아요. 이 빛바랜 스케치에는 구름이 우레와 소나기를 품고 망설이는 듯한 우울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천원의 의미를 알아버린 이십대의 이야기이겠군요? 그런 시절에 나에게도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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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07-20 1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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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 우울, 엇갈림 소나기를 품은 구름 그리고 빛나는 모서리...
정희승 선생님의 댓글이 저를 하염없는 상념의 세계로 이끄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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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09-07-21 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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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린 비'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본 기억도 나네요.
어쩌면 그 버스 안에 함께 탔었던 것 같은 느낌,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공감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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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07-21 0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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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화 선생님, 아릿한 청춘의 영화로 기억합니다.
OST 는 윤형주님이 '비 갠인 뒤 열린 하늘' 같은 목소리로 부르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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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09-07-21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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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그 여자 지금도 잊지 못하시군요 암튼 추억으로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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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07-22 0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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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문제는 그런 여자가 한 둘이 아니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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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순 |
09-07-21 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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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 마중을 나가야 할까 어쩔까 두 시간을 망설이다가 물에 빠진듯한 몰골, 파랗게 질린 입술을 맞닥뜨리게 되자 제 우유부단함에 대한 회개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는 상처가 되고 말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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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07-22 0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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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순 선생님,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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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09-07-28 0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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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단편 소설을 대하는 것 같습니다. 유려한 문장이 태어난 글쟁이 같아서 부러운 마음도 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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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07-28 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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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성철용 선생님, 감당치 못할 과찬이십니다.
그저 애릿한 추억의 한자락을 펼쳐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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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09-07-29 0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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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감상했습니다.
모두들 좋은 말씀 다 하셔서 전 할 말이 없네요.
후렴이 궁금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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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09-07-2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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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희 앵커님, 실버뉴스 잘 들었습니다.
이 기회에 전문 앵커에 도전하시면 어떠실런지요?
물론 수필은 계속 쓰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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