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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송미심 |
날짜 : 09-05-26 21:45
조회 : 2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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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레
송 미 심
아버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앙상한 팔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병상에 오래 자리한 탓에 많이 쇠잔해졌다.
“미안하다…….”
이순耳順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아버지의 고수련은 정작 어머니가 하는데도 고향과 가까이 살기에 함께 수발을 거들어주는 내게 안심찮았던 모양이다.
조단조단 이야기하길 좋아하던 아버지였는데 나이 들어 딸자식에게 야윈 몸 기대는 것이 민망했던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바지런하고 깔밋하던 아버지였으니 여식이라도 신세지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아버지에게 바람이라도 쏘여드리고 싶어 나섰다. 뒷좌석에 아버지를 태우고 도심을 빠져나가 한참을 달리다 보니 보리밭이 보였다. 보리밭 앞에 차를 세웠다. 차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네가 보이고 드넓은 들판에는 보리가 한창 패고 있었다. 내 어릴 적 고향 마을처럼 평화로웠다. 짙푸른 보리밭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미안하다니요.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그 밭을 팔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난 아버지에게 빚진 사람인 걸요.’
그동안 나를 굽죄었던 속내를 터놓고 싶었지만 그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그 밭은 아버지의 땀과 정성이 깃들었다. 땅마지기로 부자를 가름하던 시절에 아버지의 뱃심을 든든하게 하던 터전이었다. 밭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고 아버지가 삼켜야 했을 허우룩한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 애통함을 덜어드릴 만한 대가를 치르지도 못했으니 항상 면목이 없을 뿐이었다.
객지로 나가 돈벌이를 해서 쌈짓돈을 보내는 딸들이 효녀이던 시절에, 아버지는 그 밭을 팔아 내 마지막 대학 등록금으로 보냈다고 언니가 내게 귀띔을 해주었다. 많은 자식들을 도회지에서 공부시키기에는 선생님 월급만으로는 벅찼을 만도 했다. 고비마다 어렵사리 위기를 넘기곤 했는데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내게 그 보리밭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죄스러움이 보리가시가 되어 아버지를 뵐 때마다 미늘처럼 더 깊게 박혀들곤 했다.
봄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 사이로 부지런했던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아버지는 버드나무가 많았다 해서 그렇게 불렀던 ‘버뜰’ 보리밭을 누비고 다녔다. 그 시절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버지는 선친이 물려준 전답보다는 그 밭에 유독 애착을 보였다. 고향에 안주하여 손수 장만한 밭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버뜰’은 신작로가 가까운 넓은 평지여서 드나들기도 편하고 배수가 좋은 옥토라서 마을 사람들이 한 번쯤은 넘겨다보곤 했다. 농사일이 서툰 아버지였지만 일꾼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직접 그 밭에 농사를 지었다. 해돋이가 시작되는 때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아버지는 돌을 주워내고, 둑을 손질하고, 풀을 베어 퇴비를 만들곤 했다. 학교 일과 농사일로 지칠 만도 한데 버뜰 밭에 다녀온 아버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건네 드린 음료를 받아들고 보리밭을 향해 서너 번 흩뿌리며 어눌한 소리로 “고시레, 고시레( 고수레의 고향 말).”라고 소리쳤다. 젊은 시절처럼 통쾌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때처럼 눈빛에는 생기가 있었다.
내가 열한 살일 때, 버뜰 밭에서 보리타작을 하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발동기와 탈곡기, 보릿가리, 심지어는 보리그루터기에까지 술을 조금씩 붓고 안주를 떼어 던졌다. 고수레를 하는 소리는 우렁차고 눈빛은 진지했다. 고수레를 마치고 나서 아버지는 근방 들녘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술을 권했다. 막걸리 사발 돌림에 조금씩 취기가 오른 사람들은 내남없이 흥겨웠다.
발동기에 시동을 걸고 탈곡기에 피댓줄을 걸어 보리타작이 시작되었다. 보릿단을 풀어 탈곡기에 넣으면 보리 낟알들은 탈곡기 옆 구멍으로 내려 쌓이고 앞쪽으로는 부스러진 보릿대와 허섭스레기, 까끄라기, 먼지 등이 탈곡기 바람을 타고 빠져 나왔다.
나는 쌓아놓은 보릿가리에서 보릿단을 내려 일꾼에게 날라다 주는 일을 거들었다. 손이 빠른 일꾼들은 보릿단이 오자마자 잽싸게 매끼를 풀어 탈곡기에 집어넣었다. 그들의 일손에 맞추려면 부지런히 뛰어다녀야 했다.
아버지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도왔다. 흩날리는 먼지와 까끄라기를 괘념치 않았다. 그런 중에도 아버지는 탱탱한 보리낟알들을 일꾼들에게 보여 자랑하고 차곡차곡 쟁여지는 보릿자루를 헤어가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오월의 햇볕은 따가웠고 쉼 없이 돌아가는 탈곡기와 발동기 소리는 시끄러웠다. 땀으로 젖은 몸에 까끄라기와 먼지가 달라붙었다. 털어도 떨어지지 않고 동강나서 살갗을 파고드는 보리까락 때문에 오래도록 따끔거렸다.
일이 얼추 끝나 갈 때쯤, 우리 밭을 지나가던 한 무리 아이들이 달려와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남은 새참까지 챙겨주었다. 자상한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가 분명한데 먼지투성이로 망가진 아버지의 모습이 싫었다. 나는 괜스레 짜증을 부렸다. 마무리를 하자고 어르는 어머니에게 말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보리까락보다 더 아버지를 아프게 한 것은 딸이 부린 철딱서니 없는 심통이었을 텐 데도 아버지는 꾸중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나처럼 속만 앓는지 보리밭을 응시할 뿐 움직임이 없었다. 맨땅에 보리 씨앗 틔우듯 아롱이다롱이였던 자식들을 키워온 세월동안 가슴 절였던 기억들이 한두 가지뿐이었으랴.
나는 아버지의 가슴에 자리한 ‘미안한 마음’으로 고수레를 다시 하자고 했다. 그렇게라도 아버지가 짐스러워 하던 마음을 가볍게 해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도 웃으시며 그러자고 했다
“고시레! 고시레! 고시레! 고시레!”
아버지는 굳어 무거워진 팔을 머리 위로 힘들게 들어 올려가며 보리밭을 향해 부르짖었다. 그런 아버지의 손 높이에 맞춰 내 목소리도 점점 높아 갔다. 내 마음 속에 박혀있던 보리가시가 고수레로 멀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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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09-05-26 2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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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심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이곳에서 작품을 대하게 됩니다.
어버님께서 중풍으로 고생하시는군요.
고수레 풍습은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더군요.
어느책자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지난 문학기행시에는 너무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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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09-05-26 2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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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심 이사님 저도 고향이 농촌이라서 어릴때 새참을 먹으며 고시레 하는것을 많이도 보아왔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라 그런걸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시레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치 감나무에 까치밥 감을 남겨놓듯이 그 근방에 새들의 먹이도 되고 그럴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밥 한 숫갈 떠네어 고시레 하는 그 의미는 모든 것들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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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09-05-27 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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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나서 도시를 살아온 저는 농촌과 얽힌 기억이 적습니다. 그래선가 화투에 나오는 꽃과 나무 이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구요.
고수레를 통해서 부녀간의 따뜻한 정에 오늘 아침을 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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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명화 |
09-05-27 1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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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선생님의 좋은 작룸을 대합니다. 고향이 없는 사람은 무슨 추억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요. 언젠가 어떤 문우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살다보니 유년의 아름다음이 없음이 안타깝고 속상하다구요. 고향이 시골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어 부럽다나요. 선생님의 작품속에 빠져 잠시 고향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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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행원 |
09-05-28 0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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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심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정성과 사랑이 담뿍 담겨있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새삼 향수를 불러 오기도 합니다. 情景 하나하나가 옛 고향의 이야기라 동질감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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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09-05-28 2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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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심 선생님 오랜만에 선생님 글 대합니다. 지난 문학기행 때 반가웠어요.
참 효녀시군요.
부녀 간의 사랑이 묻어나 감동으로 안깁니다.
좋은 글 잘 감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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