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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등불
                              최 복 희

  봄바람과 함께 원고청탁이 날아들었다. 모교인 창명여자중학교에서 개교 50주년과 본교 설립자이신 故 鶴山 신우범 교장 선생님 별세 10주기를 맞이하여, 발행할 기념 책자에 실을 글을 보내달라는 내용이다.
 
  그 바람에 풋풋했던 중학교 시절을 회고하게 되었고, 얼마 전에 발전된 모교를 돌아보고 감격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내가 입학했을 때는 신축 교사(校舍) 3개와 교장실과 교무실은 흙바닥에 책상 몇 개 놓인 헌 건물이 전부였다. 이제는 교실과 기숙사, 체육관에 최첨단기기를 갖춘 중고등학교 3층 건물이 들어섰고, 교정은 꽃동산으로 변해 있어 격세지감을 느꼈다.
 
  나는 중학교 제5기 졸업생이다. 어느새 그토록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 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은 육이오 한국 전쟁 때, 서울에서 살던 내가 어머니 등에 업혀 피난 갔던 곳이다. 거기서 자라 중학교를 다녔기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공부를 했지만, 인정 많은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순순했던 학우들과 정을 나누던 애틋한 추억은 지난(至難)한 삶이 닥칠 때마다 마음의 위안이 되었고, 곤고했던 경험은 세파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산이었다.
 
  원고청탁서를 받아들고 아련한 추억 속에 젖어있노라니 문득 1998년 12월 12일 가슴 먹먹했던 일이 생각난다.
 
  고 신우범 교장 선생님께서 춘강(春江)상을 받으신다는 소식을 듣고 행사장으로 달려갔다. 춘강상은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선각자이신 동덕학원 설립자 고 조동식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교육부문과 여성 지도부문, 예술 활동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아 타의 귀감이 되는 분들에게 주는 상이다. 교육부문상을 수상하는 분이 바로 우리 신우범 교장선생님이었다.
 
  식장이 마련된 서울 신라호텔에 도착하니 눈부신 햇살 아래 정원 설경이 퍽 아름다웠다. 장미꽃다발을 안고 식장으로 들어섰다. 입구에는 대형 화환이 환영하듯 서 있고 반가운 얼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웬일인지 그날의 주인공인 신우범 교장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
 
  행사가 시작되면서 사회자는 수상자 세 분 중에 예술 부문의 김지미 선생만 참석하고 여성 지도자 부문의 이태영 박사와 교육부문의 신우범 교장 선생님은 와병중이어서 못 오셨다고 하지 않는가.
 
  교장 선생님은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지만 많이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나오실 줄 알았는데…. 곁에 있던 누군가가 어제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에 계신다고 하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서 부인인 천영순 교감 선생님이 대신 수상자석에 앉아계셨다.
 
  신우범 교장선생님은 서울에서 주경야독으로 대학교육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육이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폐허가 된 농촌에서 ‘이 나라를 구하는 일은 오직 교육뿐’이라는 일념으로 실의에 빠진 소년 소녀들을 모아 토담집에서 야학으로 문맹퇴치에 힘썼고, 특히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끊임없는 계몽활동을 통하여 당시 여성교육을 외면하고 등한시하던 지방의 고루한 인습을 깨고, 창명여자중고등학교를 병설하여 한결같이 지역사회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발전시켜 온 참 스승이었기에 상을 드려 격려함이었다.
 
  신우범 교장선생님 내외분의 지난 삶을 되짚어보면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상이 끝나고 꽃다발 증정 시간이었다.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제자들이 줄을 서 기다리다 천영순 선생님께 꽃다발을 안겨드렸다. 무대는 갑자기 꽃밭이 되었고, 관객들의 박수갈채는 식장이 떠나갈 듯 이어졌다.
 
  고 신우범 교장선생님은 그 당시 피폐해진 농촌에서 중등교육이란 꿈도 꿀 수 없었던 소녀들에게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신 분이다. 전교생들의 이름을 거의 기억하여 친자식처럼 아껴주시고, 특히 심신의 아픔을 겪는 제자들을 찾아 달래주는 자상한 스승이었다. 제자들 또한 졸업 후에도 부모님처럼 섬기며 자주 찾아뵙곤 했다.
 
  선생님은 있되 존경할 스승이 없고, 학생은 있어도 사랑스러운 제자가 없다는 말이 나도는 오늘날에 비춰볼 때, 그날 시상식장에서 있었던 일은 참교육의 뿌리를 보여주는 듯했다.
 
  식이 모두 끝나고 제자들은 교장선생님께 문병을 가겠다고 했다. 가족들이 중환자실은 문병이 어렵다고 하니까, 그분이 계신 문턱이라도 밟고 오겠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애걸복걸해 곁에서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관내에서 최우수학교로 손꼽히며 개교 50주년 맞는 현실을 신우범 교장선생님이 아신다면 얼마나 흐뭇해하실까. 그분은 끝내 가셨지만 남겨놓은 업적과 참스승의 사랑은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불로 우리들의 가슴을 영원히 밝혀 주리라. 
 
  눈부시게 발전된 모교의 개교 5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신우범 교장선생님처럼 훌륭하신 선생님들의 희생이 밑거름 되었고, 후배들은 학구열이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학교의 졸업생인 것을 자부한다. 창명여자중고등학교가 교육계에서도 참교육의 요람으로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길이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