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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박영보 |
날짜 : 09-05-05 16:47
조회 :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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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꽃
박 영 보
할미꽃 마나님 고개 숙이고
오늘도 무얼 그리 생각하시나
고개 넘어 시집 보낸 막내딸 아기
잘 있는지 소식 몰라 궁금하대요.
몇 학년 때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천구백오십 년대 중반쯤이 아니었나 싶다. 초등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나와 있던 대목이 오십 년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이 한 토막의 시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곤 한다. 아무 생각도 없이 운전을 하고 다니면서도 그렇고 뒷마당에 쭈그려 앉아 잡초를 뽑고 있을 때도 그렇다.
내용 중에는 내 삶에 어떤 연관성이 있거나 유별나게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대목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항상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억지스러운 구실 같기도 하겠지만 구태여 이유를 붙이자면 내용 중에 나오는 그 꽃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점과 생각에 잠기게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도 있겠다. 출가한 딸에 대한 어미의 마음 같은 데에서도 우리네 정서에 공감하게 된다는 점을 내세워도 될지 모르겠다.
별다른 이유나 동기도 없이 이 대목이 가슴속에 새겨진 이후부터는 소리 없이 피어나고 있는 이 들꽃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좋아지기도 해서 그 꽃에 대한 관찰을 하게까지 되었다.
자세히 들여다 본다 해도 결코 눈에 확 뜨이거나 시선들이 모아질 만큼 호사스럽지도 않은 일개 들꽃에 불과하다. 그런데 내가 이 한 그루의 들풀에 그토록이나 집착하며 틈나는 대로 바라다보고 있는 것이 하루 일과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지도 오래다.
겉보기에는 꽃으로서 찬사를 받을만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잎새도 산뜻한 색깔이나 모양을 갖추고 있지도 않으며 꽃 자체도 구부정한 꽃대에 거꾸로 매달린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른 눈에 뜨이지도 않는다. 회색의 솜털 같은 것으로 덮여 있어 마치 호호백발 할머니 머리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듯 한 정도이다. ‘뒷동산의 할미꽃 가시 돋은 할미꽃~’으로 시작되는 우리나라의 동요도 아마 이런 할미꽃의 겉모습만을 보고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꽃이 진 다음에는 좁쌀보다도 작은 까만 색깔의 씨앗을 실올처럼 가는 흰색 깃털 같은 부분의 아래쪽에 매달려 바람에 날린다. 착지된 곳의 흙 속에 남아있는 생명을 갈무리하는 것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며 다음 해를 기다린다.
연전 모국방문 시 선산에 성묘를 갔다가 양지 곁 모퉁이에 고개를 숙인 채 피어있는 이 꽃을 발견했다. 주변에 여러 포기가 흩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꽃이 진 것으로 몇 뿌리를 가지고 왔다. 양지 바른 장소에 심고 모든 정성을 쏟았더니 그 중에 단 한 뿌리만이 살아났다. 주변의 잡초를 뽑아주고 흙이 마르지 않도록 물도 주며 정성을 들인 덕에 뿌리를 잡기 시작하여 잘 자라주었다. 마치 고향의 한 부분을 옮겨다 놓은 것 같았고 그 이듬해에는 꽃까지 펴주었다. 마치 이곳에서 실제의 고향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제법 비싼 가격으로 사다가 심어놓은 다른 어느 꽃보다도 귀하게 여겨졌다. 우리집을 방문하는 분들에게는 이 꽃이 여기까지 와서 자리를 잡게까지 된 내력 같은 것을 설명하는 일을 빠트리지 않았다. 어떤 분들은 “그래요? 참 좋은 취미를 가지고 계시네요.”라는 정도로 마지못해 한마디씩 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고향의 옛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가워하며 좋아하는 분들도 있었다.
내가 이러한 할미꽃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이유를 알자면 이 할미꽃의 속내부터 알아 봐야만 될 것 같다. 꽃송이 자체의 겉모양은 마치 튤립의 꽃송이를 거꾸로 매달아 놓은 모습과 비슷하지만 튤립의 겉모습처럼 화사하지도 않다. 튤립의 꽃으로서의 가치는 꽃 봉우리에서 활짝 피기까지의 짧은 시간이고 그나마 활짝 펴서 헤 벌려진 모습은 볼품없기 짝이 없다. 짧은 시간에 낙화가 된 이후로는 여느 잡초만도 못하며 그 시점에서부터는 튤립으로서의 가치는 끝장이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있는 모습은 봐주기가 좀 그렇다.
그러나 이 꽃을 보라. 수줍은 듯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인위적으로 헤집어 보지 않는 한 그 내면의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진면목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 꽃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진한 꽃 자주 빛의 우단처럼 고운 살결에 황금색 꽃술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꽃이 진 다음에도 그 아름다움은 그대로 남아있다. 하얀색 명주실같이 보드라운 꽃술에 씨앗을 매달고 푸른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어찌 겉 모습만 헤 멀건 한 튤립 같은 것과 비교 할 수 있을까. 구태여 뽐내며 자랑을 하지 않더라도 보는 이들을 기쁘게 해주거나 즐겁게 해 줄 수도 있을 이 같은 아름다움을 구태여 고개 숙여 감추고 있는 그 겸손하고 아름다운 속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참 후에야 들어 알게 된 일이지만 ‘슬픔과 추억’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흔해빠지고 허울만 뻔지르르한 사랑이니 행복, 행운이나 성공 같은 것들을 뜻하는 꽃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서 더더욱 정이 가기도 한다. 슬픔이라는 것을 겪어봤기에 삶에 대한 참뜻을 알고 있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남아있는 시간이 이제까지 허송해버린 시간보다 훨씬 짧은 내 잔여의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를 생각해 보게 해주기도 한다.
겉치레에 치중하고 자기가 소유한 물질이나 재물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도 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언가 시사 하는 바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더러는 떳떳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으로 모은 물질적 풍요를 내세워가며 뻐기기도 하는 모습들이 보일 때가 있다. 또 이런 모습들 앞에서는 이유도 없이 주눅이 들기도 하는 모습들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모습의 우리에게 무슨 가르침이라도 주고 있는 듯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일 같은 일’이라도 할 수 있을까. ‘말 같은 말’ 한 마디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해 봤자 듣는 이들의 귀를 열어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을 바에야 차라리 그냥 조용히 앉아 있는 게 낳을 것 같다. 그냥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앉아서 남아있는 시간이나 축내며 지내는 것이 오히려 상책일 것만 같다. 언덕배기의 양지 곁 마른 풀밭에 앉아 지난날들의 그리운 안색들이나 그려보기도 해가며.
마치 할미꽃처럼 고개를 숙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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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09-05-05 2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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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에서 할미꽃을 가져가 기르시고 있군요.
할미꽃이 전에는 양지바른 곳에는 지천으로 있었는데 지금은
좀체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잘 기르시기 바랍니다. 정감어린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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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09-05-06 2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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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큰 도시의 고층 아파트를 본적지로 두고 있다면 지금 이 시간 저에게 무슨 추억꺼리가 남아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때가 되면 피어나는 들꽃들을 바라다보며 지낼 수 있는 뒷동산이 있던 한국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그런 곳에서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행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삼십년 넘게 이런곳에서 살아 오면서도 수시 마음으로나마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또한 축복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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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09-05-06 2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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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글을 읽고 고향에 지천으로 피어나던 할미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갑자기 고향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고향의 봄은 이렇게 변덕이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너무나 날씨가 변화무쌍합니다. 밤에는 춥고 낮에는 한여름같이 무덥고, 건강 하세요. 박영보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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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09-05-07 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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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꽃소식을 들으면 가보고 싶고, 여름엔 초록의 물결, 가을이면 단풍이나 결실의 들판이 보고 싶으며, 겨울이면 용평이나 무주리조트에서 스키를 즐기고 싶어 가보고 싶은 생각들로 가득해지기도 합니다만 요즘들어 한가지 욕심이 더 생겼습니다.
<한국수필작가회> 회원님들과 포장마차에 들려 따끈한 국물에 말아주는 국수 한사발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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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09-05-07 08: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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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할미꽃에 대한 글을 썼었기에
박영보 선생님의 글에서 공감을 많이 느낍니다.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일 같은 일’이라도 할 수 있을까. ‘말 같은 말’ 한 마디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해 봤자 듣는 이들의 귀를 열어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을 바에야 차라리 그냥 조용히 앉아 있는 게 낳을 것 같다.'
할미꽃을 인생에 비유한 대목에서 숙연해 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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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09-05-09 1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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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고개를 쳐들고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내면에 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할미꽃 같은 그런 마음의 자세였나를 생각해 보면 더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많은 부끄러움들을 감출수도 없어 잠자코 있으려니 너무 뻔뻔 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2년전 한국 방문시 받아온 씨앗이 싻을 튼 산수유 나무와 찔레나무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금년 봄에 조카가 가져다 준 산초나무 씨도 심었는데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싻이 나오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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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09-05-10 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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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꽃을 타국에까지 가지고 가서 피어나게한 그 정성이 대단하신것 같습니다. 이곳에서도 가끔 들녁에 핀 할미꼴을 캐어와서 정원에 심어두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박선생님같은 고국의 향수까지 겸하여 색다른 감회를 느끼지는 못하겠지요. 가끔 할미꽃을 보면서 그속에 빨간 융단색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답고 은은한 꽃을 왜 할미꽃이라고 했을가했는데 박선생님의 해석이 그 궁금중을 풀어주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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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09-05-10 1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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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이래 이곳에서 생활을 해오다가 만 8년만에 고국방문을 해보니 그 동안의 많은 변화는 또다른 이방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겉 모습도 그랬지만 각자들의 사고방식, 가치관을 비롯하여 모든 것들이 생소 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고향의 들풀, 들꽃 들은 그전의 그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이곳 생활 삼 십 여년이 지났지만 영원히 마음에 심어두어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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