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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강승택 |
날짜 : 18-03-13 06:17
조회 : 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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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의 순례자 (2)
12월로 접어들면서 해님 얼굴 본 지가 언제였던가 싶게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잿빛 그늘에 갇혀 하루를 보내노라면 자칫 우울증에라도 빠지기 쉬운 그런 날씨다. 읽다 만 신문, 이리저리 채널을 맞추다 꺼버린 티브이. 주변에 널려있는 소일거리는 많아도 어느 한 곳 마음 붙이기가 쉽지 않다. 목적 없는 삶이 무의미하듯 세상과 단절된 하루는 또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형벌인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니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상쾌하다. 거리는 여전히 활기차고 삶의 현장은 치열하다. 과일 상자를 앞에 놓고 열심히 시식을 권하는 사과 장수 청년. 경계석이 박힌 인도까지 어떻게 차를 올려놓았을까 볼 때마다 궁금해지는 풀빵 굽는 중년의 남자.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늦은 점심을 해결하는 채소 장수 할머니까지 모두들 주어진 여건에서 열심이다. 거기에 나 혼자 비껴서있었다 생각하니 좀 전까지 떠올랐던 갖가지 상념들이 문득 부질없어 보인다. 그래, 어디로든 떠나자. 마음을 다잡고 발길을 옮기니 어느새 지하철역 입구다.
내가 가지고 있는 버릇 중 예전에 살던 곳을 돌아보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이어서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나만의 행사가 되어 버렸다. 직장 근무로 두어 차례 나가 있었던 적은 있지만 반세기 이상을 터 잡고 살아온 도시다. 유년의 성장 과정과 삶의 흔적, 결혼 이후 가족들의 이야기가 보석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곳, 그 곳을 찾아 나서는 일이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행복한 것이다.
판암 역 1번 출구를 나와 조금 걸으면 초등학교가 나온다. 25,6년 전만 해도 도시의 변두리였던 이곳이 내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단지 아파트로 바뀌면서 학생 수도 급격히 늘어난 곳이다. 그동안 학교 모습도 많이 변했다. 방학에 들어간 듯 학교 전체가 정적만이 흐르는데 어디선가 대여섯 명의 여자 아이들이 나타나 잠든 고요를 깨운다. 반가운 마음에 불러 세우니 그중 한 아이가 “누구세요?” 장난기 섞인 얼굴로 물어온다. 얼핏 당돌해 보이는 질문이 오히려 유쾌하다. 나는 그들을 상대로 아주 오래전 내가 이 학교 선생님이었다는 것과 옛날 생각이 나서 찾아왔노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뜻밖의 손님이라도 맞이한 듯 이것저것 묻는 아이들을 상대로 나는 낡은 흑백 영화 필름을 돌리듯 기억 속의 먼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지금과는 달리 한 반 아이들이 6,70명도 넘어 쉬는 시간이면 전쟁판이 따로 없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전교생이 체조할 때면 팔을 제대로 펼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까지 이어나가다 불쑥 한 가지 제의를 한다. “얘들아, 우리 교가 한 번 불러 볼까? ” 아이들이 일제히 합창을 한다. “그래요, 선생님!”
“식장산 뻗어 내린 정기를 타고/한밭에 고동치는 거룩한 전당/깨끗하고 따뜻한 배움의 길에/갈고 닦아 빛내자 대전 판암교 ”
토요일 반성 조회 시간이면 전교생이 함께 부르던 교가다. 문득 흘러간 20 여년의 세월 앞에 내가 서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생각하면 내가 교사였다는 사실조차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오랜만에 들어본 ‘선생님’ 소리. 그래, 나는 너희들의 선생님이었구나.
아이들과 작별을 하고 학교 앞 동네로 발길을 옮긴다. 아직 아파트가 귀하던 시절, 우리는 이 곳 31평 주공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어렵게 잡은 기회여서 애착이 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파트의 위치가 철길 아래였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지나는데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입주를 포기하고 말았지만 잠시 가졌던 인연이 그리워 올 때마다 찾게 되는 곳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 폭 칙칙폭폭/칙칙폭폭 칙칙폭폭/기차 소리 요란해도/아기아기 잘도 잔다’
기찻길 옆 사람들은 아기도 많이 낳는다던데 정말 그랬을까?’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발길을 돌리면 단독주택들이 이어지고 개발이 멈춘 곳에 텃밭이 남아있다. 그 한가운데 할아버지 한 분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허공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냥 지나칠까하다 다가가니 의외로 조곤조곤 말씀을 잘하신다. 일본 징용으로 끌려갔다 다시 한국전쟁까지 참전했다는 93세의 할아버지의 삶이 기구하게 들린다. 화제가 건강으로 옮겨지자 목소리에 금시 힘이 떨어진다. 사는 게 고통이요 낙이 없단다. 아이들과 헤어진 지 20 여분 만에 초점 없는 할아버지의 눈을 대하니 온탕과 냉탕을 옮겨 다니듯 느낌이 묘하다. 피는 꽃과 지는 낙엽의 우리네 인생 여정을 보는 것 같아 착잡하다.
이제 큰길을 지나 한참을 걸으면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 용운동 집이 나타난다. 4년 남짓 살았지만 그중 재미있게 지냈다고 부부가 지금도 이야기하는 곳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개인의 역사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 인생의 황금기가 있는데 지금 생각하니 바로 용운동 시절이었다. 이때처럼 살아 갈 수만 있다면 사람의 한평생이 그리 팍팍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나는 이곳에서 이웃을 잘 만나 그들의 승용차로 여행도 다니고 테니스도 배우는 호사를 누렸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막 들어간 무렵이어서 별달리 신경 쓸 일이 없었다. 물론 이때, 아내가 처음 재봉 일을 시작했지만 틈틈이 이웃들과 어울리며 재미있게 지냈다. 음식 나누어 먹는 것을 보람으로 알았던 아내는 수시로 부부 모임을 마련했다. 노래방이 없던 시절, 흥에 겨워 젓가락 장단을 맞추다 뒤늦게 이웃 생각에 놀라 숨을 죽이며 까르르 웃기도 했고 늦은 밤, 눈이 내린다고 뛰쳐나가 딩굴기도 했다. 사는 게 즐겁기만 했던, 그래서 다가올 세상 풍파를 가늠하기엔 아직 일렀던 철없던 시절의 풍경화였다.
도시에 어둠이 내린다. 총총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나도 그들 틈에 섞여 늦은 귀갓길을 서두르기로 한다.
201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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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8-03-13 0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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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곳을 돌아보려는 심사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작업의 일환이지 싶기도 합니다.
작품을 톨하서 선생님의 근황을 살핍니다.
건강 잘 보중하시면서 작품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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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8-03-14 1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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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곳 찾아가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찾아갈 고향이 없는 저같은 경우, 특히 더하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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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권섭 |
18-03-13 1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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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정들었던 자취를 돌아보시는 모습이 성자의 성지순례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그리움이 가득 쌓인 재직학교 ‘판암교’에서는 아이들과 교가도 부르고 추억을 반추하셨으니
참으로 의미 있는 순례였습니다. 우리 인간이란 지내 놓고 나면 그리움이 쌓이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비록 힘들어도 나중에 지난 일을 추억하면 그리움이 사무치지요.
비록 노후에 가까운 때 이지만 늘 평안하시고 더욱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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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8-03-14 1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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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젖는다는 것은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반증이겠지요? 시간이 참 빨리도 흐른다는 것을 이즈음 들어 실감합니다. 건강하시고 의미있는 나날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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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주 |
18-03-13 2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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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글을 읽으니 생각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교대를 졸업하고 처음 부임한 초등학교입니다.
충북에서 가장 벽지학교라고 하는 그곳은 인심은 치고였고
교사라면 하늘에서 강림한 신처럼 대해주던 곳이었죠.
지금도 일년에 한두번씩 그곳을 방문합니다.
4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저를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계셔서 감동이죠.
선생님 글을 읽으며 저도 잃어버린 시간을 따라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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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8-03-14 1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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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부임지에 대한 기억은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을테지요. 교사를 '강림한 신'처럼 대해주었다는 표현이 재이있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처럼 아득한 옛이야기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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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8-03-14 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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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택 선생님 ! 추억을 더듬는 일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저도 늦가을이면 시제 모시러 고향을 찾아갑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할 때도 있구요. 상전벽해가 옛말이 아니로구나 ! 하고 읊조릴 때도 있답니다. 왜냐 하면 내가 살던 고향이 많이도 변해버렸기 때문이지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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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8-03-14 1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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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생님, 건강하시지요? 요즘 어딜 가나 산전벽해라는 말이 실감 납니다. 옛고향의 흔적이 어디 한 곳 남아있을 리 없지요. 그래도 임선생님은 찾아갈 고향이 있으니 행복하십니다. 늘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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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애 |
18-03-16 2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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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근무지와 살던 곳을 찾아 추억에 젖으셨군요. 마음이 참 훈훈하셨겠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길은 설렘과 즐거움을 주지요. 제가 옥천에 살 때 판암동은 자주 지나쳤지요. 그땐 정말 시골분위기였는데 이젠 아주 새로운 도시가 되었더라구요. 저도 선생님을 통해 추억에 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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