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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병식의 월석감상> 작품평/ 박양근
  글쓴이 : 임병식 날짜 : 13-08-14 05:59     조회 : 2736    
<수필과 비평 8월호- 다시 읽는 이달의 문제작 >

 월석(月石) 감상

임병식

덩그라니 뜬 월석(月石)은 희붐한 미소를 머금었다.  달 주위에는  달무리가 어리고 적당히 비추는 광도는 은은함을  유지한다. 그런  만월의 낯빛이 유독 불그레하다. 달은 비록 오석에 박혀있지만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구천장척에 떠서 내려다 본다.

이 월석이 어디에 머물고 있다가 내 곁에 왔을까. 들여다 볼수록 정이가고 감상할수록  진한 감흥이 일어난다.  월석의 사전 풀이는 달의 표면에 있는 암석, 혹은 밝은 달밤을 이른다. 하지만, 애석인들 사이에서는 달을 닮은  형상석을 일컽는다.  일종의 문양석이면서 경석(景石)이지만 눈으로 보기 보다는 마음으로 읽는  돌이다.

그만큼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며  깊은 사유를 끌어내준다고 할까. 최근에 나는 이 월석을 입수하고서  그 속에 푹 빠져 지낸다. 의식적으로 다가가지 않는데도  어느새 보면 나도 모르게 이 수석 앞에서 눈을  맞추고 있는 자신을 만난다.

 무슨 마력 때문일까. 우선은 일차적으로 워낙에 수석 자체에 빠져서 사는 탓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주지 않는가. 이 월석과 마주하면 한 두 시간쯤은 어느새 지나간다.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놓고 한 삼십분 지나면 차차로 물기가 말라 가는데  그 변화무쌍함이 또다른 볼거리를 연출한다.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어디 월석만한 것이 있을까. 수석은 본래 발견의 미학으로 시작하여 상상력을 가미해 보는  것이지만 특히 월석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여  흥취를 더욱 고조시킨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지척의 돌에서 먼 우주를 들려다보며 대화 할 것인가.

이 월석의 포인트는 뭐니뭐니해도 중앙에 약간 비켜서 박힌 흰 석영에 있다. 오석 가운데 홀연히 박힌 것이  미점이면서 포인트다. 그렇다고 다른  부분이 역할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석의 칠흑 표면은  더욱 밤다운 밤을 연출하며 분위기를 이끈다.

수석은 눈으로 보지만 기실은 마음으로 감상하는 돌이다. 진경이란 본디 마음으로 읽은 것이 아니던가.  진경산수의 대표작인  ‘인왕제색도’도 보면  담묵처리가 백이 흑으로 뒤바뀌어 있지만 마음으로 감상하기에 생동감을 더 준다. 고차원에 이르면 그러한 건  안목에 의해 가려진다. 결국은 감상안(感想眼)인  것이다.

달을 보며 때로 생각에 잠긴다. 대저 저 달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웃기고 울렸을까. 간운보월(看雲步月)이라는 말이 있지만 달밤에 내닫는 구름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눈물지었을까. 그리움은 또 얼마나 깊을 것이며 현실에서 느끼는 회한은 얼마일 것인가 .

그런 가운데서 나는 이 월석을 보면서  혜원의 ‘월하정인(月下情人)’을 그려보기도 한다. 그 그림 속에 떠 있는 달은 하현달로 그려져 있지만 실은 보름달이라고 한다. 이는 내가 억지로 지어낸 말이 아니고

이태 전 어떤 이가 조사를 해보고 1793년 음력 7월 15일 밤으로 진단한  것이다. 단서는 그림속의 눈썹달과  화제(畵題)의 글 야삼경(夜三更)이란 표현이 근거가 되었는데  왕조실록의 기록과 대조를 통해서 밝혀진  것이다.

바로 그날 밤,  여인은 머리에 쓰개치마를 쓰고  발부리에 등롱(燈籠)을 밝히는 사내와 함께 어디를 가고 있었던 것일까.  그날밤은 월식이 일어나 특별히  연분을 엮고 싶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은근한 궁금증이 동하는데 그러나 그일은 벌써 이백년의 일이다. 역사를 쓴 밀회의 정인들은 이미 백골도 진토가 되어버린 세월인 것이다.

달의 운행은 모든 생명의 주기와도 일치한다. 한달 두달 세달 이렇게 생명을 잉태시키고  차고 기움에 따라 몸을 풀게 한다. 이렇게 매일 저녁에 뜨는 달은  초저녁 서쪽에서 뜨기 시작하여 차츰 위쪽부터 부플어 오르고 보름을 깃점으로 다시 오그라 든다. 초승달은 마치 중세의 해적선과  이태백이 사랑한 호월배가 연상된다. 그리고  보름달은 의유당 김씨가 <동명일기>에 그려놓은 광경이 연상된다.

 이렇듯 한 달이면 어김없이 뜨는 보름달.  보름달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시각적인 충만의 볼륨감 말고도 신성한 의미를 갖는다. 해서 대부분의 명절은 보름에  맞춰져 있다. 보기에 우선  보름달은 훤히 밝아서  좋다. 그래서 걸어나가  치성도 이날을 골라서 했다.  만삭의 여인이 달의 정기를 흡월(吸月)하는 때도  이때였다.

그런 보름달이니 어찌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풋풋한 사랑이 그러워지고 그런 배경속에 있고 싶지 않겠는가. 하여  나는  그런저런 상상속에서 이 월석을 보는 동안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이다. < 임병식의 수필세상>


구조와 탈구조의 배합으로서 수필시학

박양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항상 무언가의 과잉 속에 살고 있다. 사람의 과잉, 정보의 과잉, 그리고 상품의 과잉에 파묻혀 살아간다. 나아가 책의 범람 속에서 살아간다. 그 잉여의 물결에 얹힌 것에는 수필도 포함된다. 날마다 발표되는 수필을 대하면 마치 나를 읽어달라고 손발을 들고 떼를 쓰는 것 같아 그냥 앞을 헤치며 빠져나간다. 이것이 사람과 상품과 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다. 여기에는 우선멈춤이라는 여유나 학습의 시간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눈길을 끄는 글을 만난다. 이미지즘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가 지하철역의 우중충한 군상 틈에서 찾아낸 선연한 한 송이 꽃 같은 소녀를 닮은 글을 만난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 한두 줄 읽다가 그만 끝까지 주욱 읽어버린다. 괜찮다는 호감으로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기억한다. 다음번에도 그의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작가가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작품을 만나는 게 이런 것이다. 알게 모르게 독자의 마음속에서 일종의 결속과 해체라는 비평이 일어난 결과이다.

위의 일화는 문학 작품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작가가 글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그와 읽는 나에 의해서 텍스트가 작품으로 완성해간다는 뜻이다. 비평이란 존재하는 작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작품으로 형성해가는 현상을 주목하는 말로서 텍스트의 구조를 해체하는 탈구조를 통해 주체와 객체의 현상을 주시하는 것이다. 문학은 문장을 통한 낯설게 하기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도 실은 텍스트는 완성상태가 아니라 작가가 구조화하고 해체하는 반복을 통해 텍스트를 만들고 독자와 비평가들이 다시 읽고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정전화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진리 탐색은 주체와 객체가 만나 현상을 구조화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체와 객체는 분리된 채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융합된 상태에 있다. 구조가 탈구조화하고 탈구조가 구조화한다. 문학작품에 대한 인식도 여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문학은 우선 정신적, 언어적 구조가 성립하고 그 구조 위에서 특정의 아름다움이나 작품이 작용 반작용을 거치면서 자신의 가치를 이끌어 낸다. 그렇다고 하여 완벽한 틀을 갖는 것은 아니다. 구조를 다시 해체하여 이분법적 모순을 자각하고 해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모순은 텍스트와 독자와의 역동적 관계에 의하여 해소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작품은 구조화와 탈구조화의 반복을 거칠 수밖에 없다.

문학작품이라고 일컫는 글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성격이나 구조들로 인하여 문학작품이 될 따름이지 그것 자체가 문학작품의 결정인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 문제작에서는 텍스트의 관점에서 부단하게 작품을 구조화하고 다시 해체하는 자기정제의 과정이 뚜렷한 작품을 선정하여 구조화와 탈구조화의 순환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임병식의 <월석감상 >

임병식은 월석을 감상하기 위하여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다. 달은 하늘에 떠 있다는 구조화된 의식을 거부하는 그는 앞에 놓여 있는 조그마한 수석을 응시하고 있다. 천문가다운 과학적 관찰이 아니라 애석인으로서 심미적 사유에 빠져들고 있다. 그래서 임병식은 자신은 월석을 쳐다보지 않고 ‘월석을 들여다본다’고 말한다.

달을 지켜보는 그의 시선은 무엇인가. 수석인이 돌에 박힌 달의 형상을 지켜보려면 심안으로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펴고, 깊은 사유를 끌어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에게는 마음과 상상과 사유가 월석을 감상하는 안목이다. 그의 월석 감상법은 판타지적인 비현실성에 빠져들지 않고 있음으로 달에 대한 소회를 수필로 기록할 때 관찰이라는 단선적 시선을 거부하고 입체적인 하이퍼텍스트적 수법을 동원한다.

하이퍼텍스트란 필요한 하부의 갖가지 텍스트를 빌려와 체계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임병식이 구사하는 하이퍼텍스트는 천문, 회화, 문학 등으로 구성됨으로써 하늘에 떠있는 달보다 수석에 박힌 달을 더 신비롭고 경이로운 풍경으로 만든다. 그는 과학적 이성적 논리에 의존하지 않고 심미적인 방식으로 월석을 소개하려 한다. 이로써 매번 지켜볼 때마다 월석의 영상과 이미지는 시시각각으로 시원(始原)을 알 수 없는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육안으로 보이는 월석은 물리적 대상에 불과하다. 월석의 포인트는 중앙에 약간 비켜서 박힌 흰 석영이다. 석영이 달을 상징하는 포인트가 되고 있다. 임병식은 ‘달은 지구의 위성이다’라는 일원론에서 벗어나 달의 위치, 모양, 빛을 해체하여 새로운 이미지와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오석의 피면도 칠흑의 밤을 연출한다. 그는 작가가 아니라 달의 애호가이므로 오석을 밤의 검은 하늘에 일치시키고 하얀 보름달을 흑백 이미지로 구조화하는 것이다.

달을 보며 생각해본다. 대저 저 달은 웃기고 울렸을까. 간운보월(看雲步月)이라는 말이 있지만 달밤에 내닫는 구름을 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눈물지었을까. 그리움으로 외로움으로 생활고로 쫓기거나 독립운동을 하며 얼마나 회한에 젖었을까.

달의 몰입한 임병식에게 달은 일정한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에 따라 수많은 형상으로 변화면서 달은 동서고금에 소개된 회화에 대입시킨다. 혜원의 월하정인은 달을 통해 그리움을 자각할 때이다. 초저녁 서쪽에 뜬 초승달에서 중세의 해적선을 떠올리는 것은 시각 이미지에 몰입하는 때이다. 보름달에서 충분한 볼륨을 연상하는 감각은 명절날과 치성의 의식을 알고 있기에 생성한다. 담묵처리도 전경산수도의 멋을 살려준다. 결국 달이란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아니고 돌 위에 박힌 것도 아니고 감상자의 마음에 박혀 있음이 드러난다. 그는 하늘의 보름달보다 해체된 달의 이미지를 더 좋아한다. ‘보름달은 가장 많은 상상력을 달리한다’고 믿고 있듯이 유당 김 씨가 쓴 동명일기, 만삭의 여인이 경배하는 모습, 보름달의 한 잔 술, 이태백이 사랑한 호월배의 반달조차 석영 보름달에서 나온다. 그래서 작가는 ‘그런 보름달이 돌 속에 박혀서 항상 나의 곁에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말하게 된다.

무엇보다 월석 덕분에 그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가 입문하고 싶은 세계는 사랑이며, ‘안타깝게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던 순수의 감정’이다. 어둠과 달이 배경이라면 더없이 풋풋한 사랑을 꿈꾸기에는 적합한 것이 없다고 믿는 임병식은 월석을 마주보고 있지만 무한대의 의식공간을 유영하고 있다. 매체는 오석에 박힌 흰 석영에 불과하지만 상상계가 투입됨으로써 하늘의 달보다 더 아름다운 미적 원형이 탄생하는 셈이다. 나아가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느꼈던 흥취와 미감의 세계를 빌려와 하이퍼텍스트라는 새로운 구조를 완성한다. 그 점에서 임병식은 구조화와 탈구조의 효과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문인일 뿐 아니라 보통사람들과 달리 텍스트를 통하여 항상 보름달을 대면할 수 있다. 그때마다 연상을 끊임없이 부여함으로써 아름다운 월석의 세계를 펼치는 하이퍼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이상원의 <검은 껌>

이상원의 <검은 껌>은 앞서 다룬 임병식의 미적구조와 달리 이념의 탈구조화를 펼쳐낸다. 그의 텍스트에 준비된 상징물은 검은 껌이다. 검은색이라는 색채 이미지와 껌이라는 일회성 기호품이 합쳐진 검은 껌은 길바닥에 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밟는 인격체를 상징한다. 그 점에서 이상원에게 검은 껌은 읽고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은유의 작은 텍스트로 나타난다. 그가 말하려는 껌은 사회조직에 의하여 소모되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버린 샐러리맨을 지칭한다.

껌은 도시인의 인기 품목이다. 사건의 무대는 자연스럽게 도시로 설정된다. 껌을 씹던 사람이 불쾌감을 느끼는 때는 ‘블록 바닥에 있던 껌이 신발에 진득하게 붙었을 때’이다. 그 껌은 쉽게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뿐만 아니라 무심한 행인이 밟아 아메바 모양으로 검게 되어 버렸다. 힘들고 패배당한 인생의 모습이랄까.

저 껌들도 흰색이었다. 새콤달콤 오묘한 맛을 지닌 채 계산대 앞에 놓여있었다. 꼬마부터 노인까지 손쉽게 선택하는 인기 상품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단물만 빨린 채 짓밟히고 밟혀 하얗던 색은 검은색이 되었다. 신발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껌을 바라보자. 누군가, 길게 늘어나면서도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어 ‘안 떨어지는 껌’이라고 표현한 그 선배가 생각난다.


이상원은 껌의 제조과정이 아니라 씹히고, 버려지고, 밟히고, 변색하는 해체의 과정을 묘사한다. 껌의 구조화된 언어는 ‘씹는 것’이지만 그 언어구조가 해체되어 ‘밟히는 것’이라는 새로운 물상과 의미를 생성시킨다. 나아가 밟히는 것은 ‘밟히는 사람’이라는 의미구조를 등장시킨다. 이상원이 생각한 껌과 선배가 지닌 공통점은 단물을 모두 빼앗기고 버려져 수모를 받는 타자이다. 선배는 초기에는 진열대의 껌처럼 인기를 얻고 비싼 값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면서 선배는 능력을 발휘하였지만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

살아있는 모든 동식물들은 번성과 쇠락을 거치기 마련이다. 조직이 해체되는 것이 숙명이고 자연이 지닌 불변의 법칙이다. 일반적으로 사회는 강자이고 개인은 약자이며 사회는 갑(甲)이고 개인은 을(乙)이다. 약자로서 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너무나 좁다. 직장에서 한때 촉망받던 그도 병이 들면서 자신의 뜻과 다른 직장경험을 하게 된다. 그 개인적인 흥망성쇠는 발에 밟힐 수밖에 없는 껌과 같아진다.

사람이면 누구나 달콤한 맛을 보면서 진열대 윗면에 진열되었다가 비싼 값에 팔리고 싶어 한다. 노동 시장에서는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의 생각이 정반대이다. 전자는 비용절감을 생각하지만, 후자는 보상심리에 의존한다. 어느 누구도 바닥에 붙어있는 껌이 되려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아스팔트 바닥에 붙어있는 껌을 비난할 수 없는 까닭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상원은 사회의 모순을 해체하기 위하여 ‘단물만 빼먹고 함부로 버린 세상에 대해 항의’하는 수필을 쓰고 있으나 그 외에 할 수 있는 선택은 별로 없다. 신발 밑창에 붙어있는 껌은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계속 붙어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두는 게 낫다. 이상원은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부당한 갑을 관계를 객체의 입장에서 살펴 모순을 지적하지만 개혁 방법을 제시하는 텍스트는 쓰지 않는다. 오직 추방된 피고용자의 일화를 빌어 냉혹한 사회를 향하여 항의의 언어를 날리고 있을 따름이다.

  박경주의 <보따리>

  박경주의 <보따리>는 담긴 내용물이 세월에 따라서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이야기한다. 내용물의 질량이 보따리의 크기를 결정한다. 물건이 클수록 보따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보따리에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집어넣거나 끄집어냄으로써 인생의 보따리를 꾸려간다. 박경주도 인생 보따리에 여러 물건을 넣거나 끄집어내고 있다. 그런데, 박경주의 텍스트가 묘사하는 보따리는 크기가 달라지고 내용물의 가치도 세월에 맞추어 달라지고 있다.

이 작품은 “작은 보따리를 집어라”로 시작한다. 작은 보따리에는 작은 물건 밖에 들어갈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논쟁거리로 등장한다. 한국전쟁 후 구제품을 나누어줄 때 가톨릭으로 개종한 어머니는 보따리의 크기와 내용물의 가치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는다. 사람들은 큰 보따리를 선택하지만, 어머니는 경험에 의하여 작은 보따리 안에 더 귀한 구제품이 들어있음을 알아차린다.

많은 보따리들이 멍석 위에서 주인을 기다렸다. 큰 보따리에서 중간 크기의 보따리, 그리고 아주 왜소한 보따리들까지 쌓여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각자의 물품을 걷어 보내준 것이라 했다. 줄을 설 때마다 미국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 박경주가 성당에서 배급하는 구제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섰을 때 그가 눈으로 바라본 것은 현상 그 자체이다. 큰 보따리에는 크고 좋은 물건이 들어있다는 믿음은 현상과 실제는 일치하는데서 비롯한다. 구제품 보따리는 어린 박경주가 해독하여야 하는 일종의 텍스트이다. 그는 보따리에 대한 단일화된 사상체계에서 벗어나, 여러 환경과 현상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탈구조주의라는 재인식을 힘겹게 습득해나간다. 그가 읽어내는 보따리라는 텍스트에는 상상이나 환상이 끼어들지 않는다. 배급 순서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어머니의 선택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 한다. 그럴 때마다 작가는 “엄마 말씀대로 제일 작은 보따리를 집어”오지만 “막상 물표를 내고 보따리를 집을 때면 큰 보따리를 잡고 싶었다”고 말한다. 왜 다른 사람들은 큰 것만 가져가느냐고 질문하면 엄마는 “큰 것은 구질구질한 것만 있어”라고 내용과 형식을 분리시켜 준다. 이렇듯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외적 구조가 아니라 내적 가치로 전이하는 인생론을 배워나간다.

 
비록 큰 보따리가 허깨비라 할지라도 큰 것을 기대하는 욕심을 포기했기에 작은 것을 택할 수 있을 것이었다. 살면서 작은 게 소중하다는 걸 새삼 느낄 때가 많다.세상의 큰 보따리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희원일 뿐이다.

  박경주는 성년 시절에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소유하고 있다. 새색시 시절엔 아들을,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땐 집을, 자식을 일류대학에 넣는 욕망을 차례차례 이루어간다. 작가는 어린 시절 구호물자 ‘보따리 파티’에 참가하였듯이 지금의 그는 인생 보따리에 현실을 담아간다. 동시에 인생이란 보따리에서 텍스트를 하나씩 끄집어내고 있다. 그럴 때 그가 느끼는 것은 “별것이 없는 게 세상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다.

결미에 다다르면 보따리에 대한 해석이 바뀌어간다. 그는 육안의 시야에서 벗어나 “요즘 보이지 않던 아주 작은 기억의 조각들이 보인다.”고 말하는 사유의 경계로 넘어선다. 구제품의 보따리가 삶의 보따리로, 다시 기억의 보따리로 옮겨간다. 기억의 보따리에 담기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심미적 언어이다. “임이 만들어준 꽃반지에 감동했던 기억”처럼 추억이라는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눈 내리는 터미널 앞에서 이불 보따리를 지키던 시어머니”와 “첫 아이에게 세례를 줄 때 성당 밖에서 기다리던 시아버님”의 모습으로, 심지어 지금은 “목의 가시가 빠진 해방감”이라는 새로운 의미소로 해체되어 간다.

사람은 물질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다. 하나는 별것 아닌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다. 어린 시절 구제품 보따리 속의 “국방색 포장지의 우윳가루와 버터”는 그들의 끼니를 보증해주는 음식이었다. 그때 작은 보따리를 가져와야 한다는 다부진 결의는 보따리의 크기가 아니라 물건의 질적 가치 때문에 좌우한다. 새색시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소망은 당시로써는 소중한 삶의 조건이었다. 지금은 기억을 되살려 삶의 가치를 연착륙시키려 한다.

박경주는 보따리를 비우려 하지 않는다. 비워낸다는 것은 위선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나이에 맞는 물건을 보따리에 채우는 일이다. 그 점에서 박경주의 텍스트는 진솔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보따리로 셈하고 있다.

  <덧붙이며>


문제작으로 선정된 세 작품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작은 현상을 해체할 때 나타난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석 한가운데 박혀있는 작은 흰 돌에서 달을 상상하고, 신발 바닥에 진득하게 붙은 검은 조각에서 직장에서 쫓겨난 동료를 회상하고, 작은 보따리 속에 담겨져 있는 버터 통을 기억하듯 그들은 텍스트의 의미소에 안주하면서도 이탈한다. 수필이란 현상을 바라보되 형상을 이루는 질료의 본질을 해체하여 언어구조 자체조차 전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수필을 사색의 창이라고 말한다면 사물과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과정을 통해 속에 담겨져 있는 본질을 끄집어내는 공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유하면, 수필이란 밤송이 껍질을 까버림으로써 그 속에 숨어 있는 밤알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윤행원   13-08-14 07:24
임병식 선생님, 오래간만입니다.
월석에 대한 글을 읽고 임 선생님의 사물을 보는 혜안과
감성의 풍성함을 보게 됩니다. 상당한 경지에 있는 글을 대하면
기쁜 마음이 깊은 곳에서 솟아남을 느낌니다.
     
임병식   13-08-14 08:08
석계선생님, 잘 계시는지요. 요즘 무더위가 연일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작품평을  <임병식의 수필세상>에만 올려놓았더니 이곳에도 가져다 놓으라는
요청이 있어서 올렸습니다.
이 작품은 어느책에 발표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인터넷에만 올려놓았는데
문학지에 작품과 함께 평이 실렸습니다.
류인혜   13-08-14 07:44
"문학 작품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는 박양근 선생의 글이 생각을 줍니다. [수필과비평]에서 읽고 반가워서 전화드려야지 했는데 여기에서 말씀을 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비평가의 입장에서는 글을 복잡하고 어렵게 해석하여 칭찬하지만 독자의 시선으로 보는 <월석 감상>은 마음에 휘엉청 둥근달이 떠오르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임병식   13-08-14 08:11
저는 처음에 깜짝 놀랐습니다. 수필과 비평에 싣지도 않는 글이 그곳에 살렸기 때문입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류선생님께서는 어느 한때 내가 애석생활을 하는 걸 알고서 기념석을 전해주기도 하셨지요.
이방주   13-08-14 13:00
임병식 선생님, <월석>은 어떤 장편 소설로도 그려낼 수 없는 자연과 인간, 우주와 자연의 조화를 찾아 일깨워 주신 걸작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평론가의 도움으로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지만 읽을수록 가슴이 죄어드는 느낌입니다. 수필문학이 아니면 어떻게 이러한 심오한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 수필문학의 위상을 한 계단 올려 놓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고두고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병식   13-08-14 14:59
너무 과대평가를 해주신것 같네요. 저는 워낙에 수석을 좋아하여 매달리다보니 자연스레 돌에 관해 쓰글이 많습니다. 등단시도 돌이야기를 썼거든요. 수석은 수필과도 매우 유사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맛이 느껴지지요. 암튼 고맙습니다.
임재문   13-08-15 01:25
임병식 선생님 ! 저도 청송에서 꽃돌에 반해서 애석생활을 시작했고,
춘천에서는 호피석에 반해서 수석광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월석감상을 하시는  임병식 선생님이야 말로 진정한 애석가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심미안을 가지고 수석을 감상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임병식 선생님  ! 풍성한 수확의 가을 맞이 하세요.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임병식   13-08-15 06:40
청송의 꽃돌은 너무나 유명하여 잘 알고 있지만 춘천에서 호피석이 나온다는 것은 처음 듣는군요. 금강에서 더러 개호피가 나왔고, 순창에서 진호피가 많이 나왔지요. 미당선생은 자기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지만, 저의 심미안을 키워준 건 8할이 수석이 아닌가 합니다.
오정자   13-08-16 07:40
명곡은 들으면 들을수록 좋아지고, 명작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평론가의 작품평과 함께 이 작품을 감상하니 반짝반짝 더욱 빛이 납니다. 작가의 심미안과 문학적 상상력의 힘을 보여준 수필문학의 진수를〈월석 감상〉에서 맛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임병식   13-08-16 09:14
태평양을 건너온 반가운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곳 하늘에도 보름달은 떠오르겠지요. 누구보다도 작품을 근성있게 쓰시고 남다른 수필사랑에 빠져 사시는 오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저는 누구로 부터로 배운 바가 없는 사람으로 수필은 오직 '개성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일만성철용   13-08-17 14:09
새로운 글의 짜임에 어리둥절하다가 두 번재 찾아와서 읽고 있습니다.
단순 속에 복잡, 복잡 속에 단순을 읽고 있습니다.
     
임병식   13-08-17 17:06
일만 선생님 댓글 고맙습니다. 작품을 인테넷에만 올려두고 정식으로 발표한 것도 아닌데  평이 실려서 옮겨놓았습니다. 기승을 부리는 노염에 건강  보중하기길 바랍니다.
김창식   13-08-19 10:53
임병식 선생님, '월석 감상'은 사유가 있는 서정수필의 전범으로 울림이 와닿습니다.
인용된 다른 두 수필도 좋고 박양근 교수가 언급한 '하이퍼 텍스트론'도 공감합니다.
     
임병식   13-08-19 16:16
김선생님, 댓글 고맙습니다. 수석을 좋아하다보니 늘 가까이 하고 감상을 하는데  이것이 모르는 사이에 미적인 감상안과 심미안을 길어준것 같습니다.

신작 수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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