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너

최원현

nulsaem@hanmail.net

눈이 커졌다. “어?” 동시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는 신음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어떻게 여기에 와 있게 된 것일까.

나도 아내도 사실 포기를 했었다. 그럼에도 한 번 더, 한 번 더 하며 있을 수도 있을 희망의 줄을 기도처럼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도 내가 이미 두 번이나 찾아보았던 곳이다. 놓칠 수도 있다 싶어 한 번을 더 뒤져보기도 했었고 그래도 없었다. 그런데 아무 기대도 없이 들춰 본 곳에 이렇게 있지 않은가. 소파에 놓인 과자 상자 옆에 세워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3일 동안의 끈질긴 수색 끝에 얻어낸 개가인가.

20년 전에 허리 수술을 받았다. 덕택에 큰 고통 없이 지내왔다. 더러는 무리해서 고생할 때도 있긴 했지만 그때마다 주사 치료로 잘 견뎌왔다. 한데 근래 들어 아주 기분이 나쁘게 통증이 느껴졌다. C-T촬영을 해 보니 수술 받은 척추 3.4.5번이 많이 닳아 버려서 이젠 허리 근육의 힘으로 척추를 받쳐주는 수밖에 없겠다고 했다. 나름의 운동법으로 통증을 완화시켜 보지만 다리는 가늘고 배가 나와 버린 내 체형은 자연 허리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연히 발 클리닉에 가게 되었다. 왼발과 오른발의 모양이 많이 달랐다. 그래서 균형감도 없고 허리도 더 아픈 것이란다. 발을 편하게 해 줘야 허리도 오장육부의 기능도 좋아진다는 말에 모형을 뜨고 교정판을 주문했다. 거금이었다. 그러나 좋아질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투자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제작해 온 밸런스 오쏘틱스라는 발 교정 신발 안창은 신발에 깔고 신으면 발의 반에 해당하는 뒤쪽 부분이 그곳에 닿게 되어 있었다.

조금씩 적응해 가도록 하라 했는데 또 성급함이 발동하여 그걸 착용하고 내리 3일을 다녔다. 열 발가락과 두 발뒤꿈치까지 순식간에 물집이 생겨버렸다. 그게 다 낫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그동안 교정 안창은 늘 내 서고 입구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요 며칠 허리가 심하게 아팠다. 해서 발도 나았으니 그걸 다시 사용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게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그걸 못 본 것 같다.

둘만한 곳, 밀려서라도 들어갈 만한 곳까지 다 찾아보았다. 혹시 다른 곳에 옮겨놓지 않았나 기억을 살려 보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둘만한 곳, 있을만한 어떤 곳에도 없다. 결국 아내가 의심되고 청소하다 버렸을 것이라는 쪽으로 의심을 몰아갔다.

아내는 아니라고 했다. 그걸 버린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보았지만 만지지도 안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사를 해서 큰돈을 들여 제작해 온 그걸 내가 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누가 와서 가져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아내가 버리는 것 외엔 없어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내는 어떻게 그런 걸 버릴 수 있느냐고 했지만 버려지는 것도 모르게 버려졌을 거라고 나는 응수했다. 나중엔 아내도 상황에 거의 동의를 했다. 아내는 청소기를 잘 안 쓴다. 밀대에 끼운 걸레로 청소 후 버릴 것들을 주섬주섬 모아 버리는 과정에서 무심코 그것도 함께 쓸려 버려졌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어디엔가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 바람과 기대로 난 찾는 일은 쉬지 않았다. 만일 없어져 버렸다면 돈도 돈이지만 다시 클리닉에 가서 검사를 하고 모형을 떠서 새로 제작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시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착용해 보지도 못한 거나 같기 때문에 효능에 대해서도 미지수다. 그러니 다시 제작을 해서라도 효과는 알아봐야 한다.

내 성격은 무슨 일이든 하던 일을 완전히 마쳐야 맘을 놓는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이 불안해서 견디질 못한다. 책이 쌓여있는 내 방과 책상 위를 말끔히 정리하여 혹 그곳에 있는가를 확인 했고 여러 가지가 엉키고 쌓여있는 서고도 정리를 했다. 책장 사이사이도 다 들여다보고 손녀들이 왔을 때 손을 댔을까 싶어 아이들 장난감이 있는 방도 두 번 세 번 확인을 했다. 혹 딸이 치웠나 해서 전활 해 봤으나 그도 못 봤다고 했다. 잠을 자러 누웠다가도 안 찾아본 곳이 생각나면 바로 일어나 다시 찾아보았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면 잘 두기나 하지 왜 그렇게 방치해 두었느냐고 내 안에서도 질책이 끊이지 않았다. 누가 그걸 손대겠느냐고 항변을 하면서 반은 포기, 반은 놓아버리지 못한 희망으로 내 눈과 손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런데도 성과는 없었다. 버려졌다는 증거조차 어디서도 나와 주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었던 것이다.

버려졌다면 범인은 아내인데 태연한 아내를 보자 화가 났다. 이왕 이렇게 된 것을 어쩌느냐는 아내의 말은 지극히 당연하건만 그 말에도 더 서운하고 화가 났다. 고생하고 비싼 돈 들여 제작해 놓은 것을 버려놓고도 저렇게 태연한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러진 못할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여자가 훨씬 침착하고 일 처리도 잘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너무 빨리 포기하고 적응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서운함이 더 컸다. 그런 내 마음을 표출 시키는 것은 화를 내는 것인데 그래봐야 나만 더 화가 날 뿐이다. 그것도 접어두고 끓는 화를 스스로 자제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곳을 찬찬히 두루 다 찾아보았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덕택에 질서 없이 마구 널려있던 책이며 원고며 가방들이 많이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

손에 든 밸런스 오쏘틱스(신발 안창)를 바라본다. 아내에게 문자 메시지를 띄웠다. 그것 찾았다고. 그런데 아내를 의심하고 몰아세웠던 게 많이 미안하다. 아내에겐 그런 전력이 몇 번 있었다. 무엇을 버리는 지도 모르게 버려졌던 것들, 한 계절이나 한 해가 지난 후 그렇게 버려진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 여러 번이었기에 이번에도 그랬으려니 하여 그 전과가 아내를 범인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아니라고, 이번만은 아니라고 우겨댔다면 아마 거친 싸움이 일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난 전력들이 다 등장할 게고 둘은 씩씩대며 싸우고 몇 날 며칠 쯤 말도 안 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엔 아내도 여느 때와 달리 다소곳했다. 깜박깜박하는 정신과 그렇게 버렸을 수도 있다는 정황이 그것들을 그대로 수용케 했었던 것 같다. 옛 말에 남대문 안 가본 사람이 서울 사람 이긴다는 말, 남대문 문지방이 대추나무라고 우기는 서울 안 가본 사람에게 남대문엔 문턱이 없다는 서울 사람이 졌다지 않는가.

우리 삶엔 사실 이런 억지의 승리가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목소리 크면 이기고 주먹이 먼저 앞서야 이기는 세상, 원칙보다 힘이 먼저이거나 아니란 것을 증명 못해 당하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상황을 정리해 보면 내가 그곳에 가져다 놓았을 수도 있고, 아내가 그리 했을 수도 있고, 다섯 살, 세 살 손녀가 그걸 그곳에 가져다 놓았을 수도 있다. 어떤 가능성이 더 클까는 상관없다. 다만 이 마당에선 누군가의 손으로 있던 곳에서 이곳으로 옮기어 진 것일 텐데 아무도 그걸 기억 못 한다. 만일 찾지 못 했다면 아내가 영락없이 그걸 버린 범인이 되었을 테고, 나는 다시 발 클리닉에 가서 또 한 벌을 맞추었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많은 공범을 만들고 공범자가 되는 것 아닌가.

손에 든 밸런스 오쏘틱스를 신발에 넣는다. 구부리는 허리가 더 아픈 것 같다. 이걸 신고 늘 다니는 공원 산책 코스라도 한 번 돌아와야겠다. 하마터면 아내 뿐 아니라 예쁜 손주녀석들까지 범인이 될 번했다. 그렇고 보니 범인이 밝혀져서 유쾌한 우리 모두는 공범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공범이 되고 공범을 만들고 있었다. 신발 속에서 오쏘틱스가 발바닥을 지그시 압박해 온다. 그런데 그 시원한 통증이 ‘범인은 너야’ 하는 것 같다.

최원현 http://essaykorea,net

수필가·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사)한국수필가협회 감사, 한국수필작가회장(역임). 수필세계·좋은문학·에세이포레·건강과생명 편집위원. 한국수필문학상. 동포문학상대상. 현대수필문학상. 구름카페문학상 수상 외.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문학에게 길을 묻다> 등 1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