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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임병문 |
날짜 : 11-11-15 20:11
조회 : 2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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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병 문
세월이 흘렀어도 나는 그 노래를 잊지 못한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그 노래를 처음 들었던 것은 감수성이 예민했던 내 사춘기 시절 어느 날로 기억이 된다.
바람이 소슬하게 이는 그 가을 녘, 쪽빛 창공으로 길게 길게 여울져가던 그 애잔한 노래 소리에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때 나는 내 어린 생에 처음으로 맺지 못할 인연에 번민했었고, 덧없는 사랑에 가슴앓이를 하면서 세상이 온통 허무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들었던 그 노래, 그것이 바로 동심초(同心草)였던 것이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중략
나를 울렸던 그 노래, 무엇이 그리 애달프고 무엇이 그리 허무했던가. 그 사연은 하마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멀리 중국 땅 성도(成都)에 이른다.
성도는 예로부터 전원의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이곳이 바로 그 옛날 설도(薛濤)와 원진(元稹)이 처음 만나 사랑을 불태우고 이별에 울어야했던 중국판 러브스토리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설도(770~830)는 중국 당(唐)시대의 여류시인으로서 자는 홍도(洪度)로 장 안(長安)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사천성의 성도로 옮겨 기생이 되었다. 그녀는 시재(詩才)가 뛰어났고, 손수 꽃잎을 찧어 붉게 물들인 색종이에 섬세하고 정취어린 시와 편지를 잘 썼다.
설도가 만들어 썼던 이 아름다운 꽃종이를 사람들은 설도전(薛濤箋)이라 부르며 연서(戀書)를 쓰는 종이로 널리 애용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설도가 직접 물들이고 시를 써넣은 진품 설도전은 멀리 황실에서조차 보관할 정도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설도와 원진이 처음 만난 것은 1200년 전 어느 봄날이었다. 일찍이 설도의 시재를 남몰래 흠모했던 천재 시인 원진은 우연찮게 그녀가 살고 있는 성도의 감찰어사로 부임을 하게 된다. 설도 역시 원진의 타고난 문재(文才)를 익히 알고 있던 터여서 그 둘은 쉽게 친해질 수가 있었다.
설도는 손수 만든 꽃종이에 시와 편지를 적어 객지의 원진을 극진히 보살폈고, 원진 또한 그녀의 감미로운 설도전을 받아들고 다시 화답시를 보내며 그들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하지만 얼마 후 원진이 다시 중앙으로 발령을 받고 성도를 떠나게 되었다. 짧은 만남에 정은 깊고 이별은 서러웠다. 눈물로 밤을 밝힌 그들은 날이 새자 둥근 벼루를 반으로 갈라 서로 한쪽씩을 간직하며 훗날을 기약하는 정표로 삼았다.
이때 설도의 나이 40이었고, 원진은 그보다 10년이 연하인 젊은 귀공자였다. 정인(情人)을 보낸 설도의 마음은 한없이 공허했다. 스스로는 이미 시드는 꽃이었고, 원진과도 결국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동심인(同心人)이 될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하지만 여인의 마음은 이를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이별할 때의 언약은 세월 따라 점점 멀어져가고, 하루해는 달리 듯 저물어 늙음만 재촉하였다. 더 늦기 전 어서 빨리 정인을 만나 사랑을 해야 하건만 한번 떠난 사람은 소식이 없다.
누군가 풀 엮기를 하면 만남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한마음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원진과는 맺어지지 않고, 한갓되이 풀잎만 엮는 설도의 마음은 애달프기만 하다.
일찍이 마음을 엮을 수 있는 동심초라는 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설도가 엮었던 풀잎이 그 풀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설도의 소망이 짙게 배인 애절한 춘망사(春望詞), 그 4수가 보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할뿐이다.
‘꽃이 피어도 함께 즐길 수 없고 /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 묻노니 그대는 어디에 계시는가 / 때맞추어 꽃들만 무심히 피고 지네.’
‘풀을 따서 한마음으로 맺어 / 내 마음 알도록 임에게 보내려 하는데 / 봄시름은 속절없이 끊기고 / 봄새들은 다시와 애달피 우네.’
‘꽃은 바람에 날려 시들어가고 /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가네 / 그대와 한마음 맺지 못하고 / 부질없이 편지들만 오고 가네.’
‘어찌 견디리 가지 가득 핀 저 꽃들 / 괴로워라 사모하는 마음이여 / 눈물이 주루룩 아침 거울에 떨어지네 /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원진 역시 이사(離思)라는 시를 읊으며 멀리 있는 설도를 그리워한다.
‘창해(滄海)를 보고나선 세상의 강이 대수롭지 않고 / 무산(巫山)을 보고나면 구름이라 할 것이 없네 / 아름다운 꽃을 봐도 즐겁지 않은 것은 / 반은 수도(修道) 때문이고 그 반은 내가 임을 그리기 때문이라네.’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시를 남긴 여류시인 설도, 그는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사랑의 감정을 붓 끝에 모아 시로서 한평생을 산 기생이었다.
일찍이 조선의 허균(許筠)은 기생 계랑(桂娘)의 영전에 망자를 설도와 비유한 시를 올려 떠난 자를 높이 기렸다. 더불어 소월(素月)의 스승인 안서 김억(金億)은 설도의 시 춘망사를 한글로 번안해 가곡 ‘동심초’의 노랫말로 삼았으니, 애절한 그녀의 시혼(詩魂)은 시공(時空)넘어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봄비처럼 적신다.
활짝 핀 봄꽃 속에 이제 곧 시들고 말 스스로를 생각하며 아침 거울에 눈물을 떨어뜨리는 한 여인의 비애, 그의 춘망사는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천 년 전의 그 여인을 생각하노라면 사랑이란 한 점 늙어서도 아니 되는 것, 그것은 감히 이룰 수 없는 인간의 꿈이 아니었던가.
불현듯 가는 세월이 두려운 것은 내게도 아직 그런 꿈이 남아서일까. 아니다. 그건 아닐 것이다.
봄이 왔지만 봄은 이미 그 봄이 아니고, 철따라 꽃은 피고 꽃은 져도 세월은 하마 그 세월이 아닌데 춘망사, 그녀의 꿈은 천년을 가도 변치 않으니 다만 그것이 두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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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1-11-15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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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문 선생님 ! 저도 동심초라는 노래를 한 번 불러보고 싶어집니다. 저는 요즘 트로트에 심취해 있습니다. 대한민국 음치중에서도 최고수 음치인 제가 요즘 트로트에 매료되어 인터넷 트로트 라이브 가수로 활동중입니다. 트로트는 속어로 뽕짝이라고도 하지만, 그곡이 슬픔을 가득 머금은 곡이라 생각합니다. 어떻은 이밤에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동심초를 한 번 불러보고 저도 홀로 눈물 젖어 보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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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11-16 0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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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오랫만에 뵈웠지만, 글도 마음도 여전히 건강하신 것 같아 마음 든든합니다. 더욱이 트로트에 푹 빠지셨다니 다행한 일이군요. 노래란 역시 불러도 들어도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언제 한번 들려주시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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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1-11-15 2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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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생님다운 낭만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 가곡 '동심초'의 원전이 춘망사에서 온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저의 궁금증은 '내 어린 생에 처음으로 맺지 못할 인연에 번민'하게 했던 바로 그 상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번 풀어놓으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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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11-16 0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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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늦도록 주무시지 않고 무얼하셨습니까. 혹여 그 날의 일들을 떠올리시며 비분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하여 제가 말씀드린대로 다음 차례를 약속받아 두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후일을 위해 힘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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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1-11-16 1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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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초'는 가곡 중에서 가장 즐겨부르는 곡 중 하나입니다.
'풀잎을 맺는다'는 말의 뜻을 확실히 알게 되어 고맙습니다.
문득 '생애 처음 맺지 못할 인연'과 '그날의 일'이 궁금해지네요.
뒤를 두고 하는 비밀스런 이야기는 늘 호기심을 유발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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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11-17 0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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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숲은 하릴없이 아름답다, 피고, 지고, 쌓이고, 모든 것이 잠잠한 그 곳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리움, 그것 뿐인듯싶습니다. 수걱수걱 11월의 숲을 헤집는 선생님의 무구하심이 진정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항시 건강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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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
11-11-16 1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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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세월동안 되새기던 설도가 천 몇 백 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드디어 이곳으로 나들이 하셨군요. 그 아릿다운 자태가 사뭇 궁금합니다. 성도 하늘로 돌아가는 노자 돈 마련 때문에 혹시 어느 막걸리 집에서 아르바이트 한다는 소식 듣지 못하였습니까? 천리라도 마다않고 찾아 가겠습니다. 저가 중국말은 좀 할 줄 알거든요. 그리고 다음 차례 약속은 내가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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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11-17 07: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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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도의 자태가 궁금하십니까. 나이 들었어도 한 입 베어 물면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밀도, 그 것 같다고 古史는 적고 있습니다. 마음이사 그 여인을 좇아 성도에 가고 싶지만, 선생님이 가까이 계시니 막걸리 한 잔, 그것으로 그리움을 견뎌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차례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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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1-11-17 0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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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시절 사랑방 마루에 걸터앉아서 부르던 동심초!
마당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 있고 감나무는 감을 주렁주렁 무수히 달고 축 늘어져 운치가 그만이고 시작은 내가 했는데 옆집 앞집에서도 화답하는 노래소리.
좋은 시절이었으니까. 걱정 근심 없는.
선생님 글은 옛날을 생각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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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11-17 1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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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시절, 사랑의 마루에 걸터 앉아 부르던 그 노래, 좋은 시절 부르던 그 노래가 기어이 앞뒷집 그니들의 마음을 열게 하였군요. 선생님의 순정이 가을 창공에 여울지듯합니다. 항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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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11-17 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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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어디 '설도' 없나요? 우리 모두 '원진'과 '설도'가 됩시다. '퇴계'와 '두향'이 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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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11-17 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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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도를 찾으십니까. 두향도 설도도 모두 다 선생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날잡아 언제 한번 원진처럼, 퇴계처럼 그리 되는 날을 꿈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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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11-11-18 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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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러 오는 봄 꽃비에 지고 갈증 깊은 여름 폭우로 밀려난다 피멍든 가을 그리움의 흔적이 깊어... 봄이 가고 꽃이 지면 눈 꽃에 묻혀 낭만적인 시 한수로 세월을 엮어봄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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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11-18 08: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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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추적이는 새벽녘, 선생님의 자취로 아침을 엽니다. 선생님의 詩情처럼 가야하는 계절에, 단념의 시절에 이처럼 멈춰서서 글을 보아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항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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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1-11-23 0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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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 얽힌 이냐기를 더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게 하는 글입니다. '소양강 처녀', 일송정', '칠갑산' 등등의 이야기를 쓴 일이 있거든요. 위 시만으로 보미 설도가 원진보다 한 수 위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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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11-23 0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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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고맙습니다. 그 '프로' 정신에 후배는 경의를 표합니다. 쓰고 싶은 욕구, 쉼없는 고찰과 정열, 무한한 호연지기, 모두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일송정'과 '칠갑산' 일찍이 쓰고 싶었던 소재였습니다. 항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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