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1학년 여름이었습니다. 한번은 전체 급우가 다섯 씩 조를 짜서 아침부터 도로측량 실습에 나섰습니다. 점심때까지는 돌아오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흘려들으며 우리는 서둘러 현장으로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우리 조가 측량할 도로구간은 학교에서 멀기도 하려니와 험한 가풀막이 많았습니다. 칠월의 땡볕이 점점 위세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볼품없는 미루나무 몇 그루가 누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한길에서 우리는 연신 손수건을 쥐어짜며 파김치가 되어갔습니다. 오후 두 시가 되어서야 측량을 마쳤습니다. 우리는 교실에 두고 온 도시락을 아쉬워하며 너나없이 자장면 곱빼기를 외쳤습니다. 나는 버스비를 털어 자장면 값을 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니 활달한 K가 불쑥 일어나더니 툭 한 마디 던졌습니다.

  “니들 도시락은 우리가 다 알아서 처리했다.”

  우리 조 애들은 각자 빈 도시락을 확인하곤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내 도시락은 그대로 묵직했습니다.

  동네잡고 우리 집 농사는 꽤 많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쌀을 사서 아버지 지병 치료비를 대다보니 쌀뒤주가 이듬해 가을까지 버텨내지 못했습니다. 어지간한 이웃들도 여름에 쌀밥을 먹고사는 건 아니었지만 아침밥을 지을 적에 한두 줌이라도 쌀을 얹어 학교 가는 애들 도시락만큼은 낯을 세워주었습니다. 여름에 접어들면 우리 집에선 쌀을 구경하기 어려워 꽁보리밥 도시락은 내 숙명이 되었습니다.

  그날 아침에도 어머니는 도시락에 쌀 한 톨 섞지 않았습니다. 부엌문께서 지켜보던 나는 드디어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아니 오늘도 쌀 한 톨 없는 보리밥이란 말이어요? 차라리 굶고 말테니까 내버려두세요!”

  어머니의 주걱이 주춤하더니 시간은 멈추고 침묵에 빠져들었습니다. 나는 그 정지화면 속에서 홀로 흐르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나는 책상 속으로 손을 넣어 아무도 손대지 않은 차가운 도시락을 만지작거리며 밀려오는 후회에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가끔 동구 밖의 늙은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려있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점심때마다 보리밥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급우들은 한사코 내 도시락을 쟁탈하며 흰 쌀밥을 내밀곤 했습니다. 

  국군○○학교에서 두 달 교육이 마무리 될 무렵 어머니와 아내가 면회를 왔습니다. 세 살짜리는 걸리고 아기는 업고 왔습니다. 나는 처자식 버려두고 군대에 간 몹쓸 남편이었습니다. 서너 시간의 짧은 해후가 끝났습니다. 포대기로 업은 아이를 한쪽 팔로 추슬러 올리고 다른 한 손은 자꾸 얼굴로 가져가며 멀어져가던 아내의 뒷모습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그때에 나는 아내의 눈물방울이 위병소 쪽 가장 높은 미루나무 우듬지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대 생활에 이력이 날 즈음, 면회두절이 어찌된 영문이냐며 고참들이 성화를 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날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려있는 아내의 눈물방울을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며 다시는 아내가 면회를 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었습니다.

  졸지에 가장이 된 아내는 돌봐 줄 사람도 없는 철부지 아이들을 온종일 떼어놓은 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 보면 아이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내는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나는 휴가를 마치고 귀대할 적마다 아내의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그 돈을 짐짓 받아 넣었습니다. 아내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철없고 무력한 가장의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며 귀대를 서둘렀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 아내가 통박을 놓았습니다.

  “처자식 내버려두고 군대 간 인간아.”

  내 소년시대의 미루나무에는 노아의 방주가 닻을 내리곤 했습니다. 별들이 소슬바람과 함께 브론테 자매와 버지니아 울프를 이야기 할 적부터 미루나무는 ‘겨울나무’가 되었습니다.

밤을 새우는 바람소리를 따라 내 영혼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갑니다. 어둠 속에서 오랜 시간 미루나무를 쳐다본 탓에 눈물이 흐릅니다. 내 미루나무에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수많은 소망들이 꿈의 조각으로 빛나기도 했습니다.

  지금 그 한길 가엔 미루나무가 없습니다. 파란 하늘에 눈물이 어릴 만큼 높다란 미루나무는 추억 속에 살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하는 슬픔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사무쳐 견디기 어려운 날이면 들녘에 나가 앞산 능선을 응시합니다. 길게 누운 능선 위 하늘가에는 미루나무가 언제나 위대한 나목으로 서있습니다. 나는 그 꼭대기 마지막 가지 끝에 걸려있는 눈물방울을 바라봅니다.

  어느덧 그것은 어머니의 눈물도 아니고 아내의 원망도 아닙니다. 

  오늘 밤엔 꿈을 꾸고 싶습니다. 꿈속에서 나지막하게 외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