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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임병문 |
날짜 : 11-02-11 18:27
조회 : 2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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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무너져도 당신이 늘 그립습니다
임병문
이별의 슬픔은 사창(紗窓)가득 달빛에 젖어들고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다. 드디어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오직 두려울 뿐이다.”
앳된 여인이 말없이 일어나 불(燈)을 밝히고 먹을 갈아 화선지에 시(詩) 한 수를 써내려간다. 타드는 황촛불에 붓끝은 고요히 떨고, 짙은 묵향(墨香)은 방안 가득 서로가 기억해야 될 마지막의 체취인양 폐포 깊이 침향처럼 스며든다.
‘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제 / 어느덧 술 다하고 임마저 가는 구나 / 꽃이 지고 새우는 봄날은 어이할까 하노라.’
이렇게 마지막 밤을 보낸 두 사람의 인연은 그 후 너무도 긴 이별로 이어졌다. 퇴계가 그의 나이 6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21년 동안 두향(杜香)은 그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퇴계 나이 48세에 단양군수로 있을 적이었다. 당시 18세의 고을 관기(官妓)였던 두향은 퇴계의 인품을 남몰래 흠모하고 있었고, 퇴계 역시 아내와 자식을 잃고 홀로 객지인 단양에 와 군수로 재직하던 헛헛한 시절이었다.
공허하고 적적한 퇴계는 시 잘하고 가야금에 능한 어린 기생 두향에게 끌렸고, 두향 또한 그런 그가 싫지 않았으니 그들이 정분을 맺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렇게 만난 둘이는 서로가 의지하며 아끼고 사랑하기를 끔찍이 하였다. 어느 때는 부녀의 애틋한 정이요, 어느 때는 남녀의 뜨거운 연정이요, 어느 때는 스승과 제자의 각별한 정으로 둘이는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한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연(緣)을 맺은 지 아홉달만에 그들 앞에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퇴계가 경상도 풍기 군수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었다. 짧은 만남 뒤에 찾아든 갑작스런 이별은 두 사람에게 견디기 힘든 슬픔이고 충격이었다.
떠나는 정인(情人)의 짐 속에 두향은 매화분(梅花盆)을 넣어주며 퇴계를 눈물로 보냈다. 퇴계는 이때 받은 매화를 평생 가까이 두고 두향을 대하듯 애지중지하였다. 이런 퇴계가 나이 들어 스스로의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며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는 한 남자로서 여자에게 자존을 지키고 상대를 애모함에 있어 한 치의 추함도 보이지 않는 고아(高雅)한 사람이었다.
매화와 함께 찾아온 어느 이른 봄, 퇴계는 멀리 있는 두향을 생각하며 두 편의 시를 읊고 써 그 중 하나를 정인에게 보냈다.
‘ 뜰 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 눈꽃이 피니 /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보며 / 기러기 슬피 울제 생각마다 심란하네.’
‘ 누렇게 바랜 옛 책속에 성현을 대하며 / 비어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마라.’
퇴계의 매화 사랑은 자못 곡진하고 남달랐다. 그래서 매화를 노래한 시가 일백 여 수에 이른다. 그가 매화시첩(梅花詩帖)에 읊어 놓은 그 수많은 시편들은 절절이 정인을 향한 그리움이요, 편편이 두향을 보듯 읊고 그린 연모의 정뿐이었다.
그의 이런 매화에 대한 남다른 집념에는 일찍이 그가 가족을 연달아 잃고 방황할 때, 한 떨기 설중매 같은 고결하고 애틋한 정으로 그의 빈 가슴을 채워준 두향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에 기인된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런 두향을 단양 땅에 남겨두고 멀리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홀로 노년을 보내던 퇴계는 어느 날 두향이 인편(人便)으로 보내온 수석(壽石)과 분재(盆栽)를 받았다. 단번에 그것이 단양에서 두향과 함께 보고 기르던 것임을 알아본 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인이 보내준 화초를 바라보며 퇴계는 병들고 외로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밤이 깊도록 서원의 뜨락에 서있는 매화 곁을 임의 치맛자락 맴돌듯 돌며 두향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한 수 시를 읊었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이다.
‘ 홀로 기댄 산창(山窓)에 밤기운 찬데 / 매화가지 끝에는 둥근 달이 뜨네 / 이제 다시 미풍이 불어오지 않아도 / 맑은 향기 스스로 온 뜰에 가득해라.
나막신 끌며 뜰을 거니니 달이 따라 오네 / 매화 곁을 돌고 돌아 몇 바퀴나 돌았는지 /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 날 줄 모르니 / 향기는 옷에 배고 그림자는 몸을 덮네
늦게 피는 매화의 참뜻을 깨닫노니 / 추울 때를 겁내는 내 몸을 아나보군 / 어여뻐라 이 밤에 내 병이 낫는다면 / 밤새 달빛아래 바라보고 있으리라.’
퇴계는 어느 봄 날, 스스로의 삶이 끝자락에 와 있음을 알았던지 자신이 마시던 우물물을 손수 길어 두향에게 보낸다. 두향은 눈시울을 붉히며 물을 받았으나 차마 마시지를 못하였다. 그리고는 새벽마다 몸을 정히 하고 퇴계의 건강을 비는 정화수로 소중히 다루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화수의 물색이 핏빛으로 변해있는 것을 본 두향은 정인의 신변에 변고가 생겼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소복을 입고 멀리 안동까지 사흘을 걸어 서원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이 죽어서야 비로소 만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퇴계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매화에 물을 주어라.”였다. 그는 죽는 날까지 두향을 그리워하다가 숨을 거둔 것이다.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퇴계를 기리며 곡기를 끊더니 마침내 남한강에 몸을 던져 그리던 정인 곁으로 갔다. 퇴계와 이별한지 21년만이었다.
세월은 차마 덧없이 흘러 그들이 간지 어언 수백 년이 지났다. 변하고 변한 그 많은 시간을 거슬러 나는 오늘, 두향이 고운 꽃신 벗어 놓고 백방사주 스란치마 고이 접어 둘러쓰고, 한 떨기 꽃처럼 산화한 푸른 물결 도도한 남한강가에 망연히 서있다.
두향에게 사랑은 무엇이고 외로움은 무엇이며, 신분과 규범과 윤리는 진정 어떤 의미의 소용이었을까.
그토록 오랜 세월 그들이 사랑을 유지하며 지탱할 수 있었던 그 사랑의 진실은 정녕 무엇이었을까.
모진 세월 두견 빛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발갛게 물들었다가 덧없이 스러져간 꽃 같은 여인 두향, 그런 그가 있었기에 사랑은 보석처럼 빛났고 그런 그가 갔기에 사랑은 영원히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장회나루 물 건너에 말없이 누운 당신을 기리며 한 수 시를 읊어 삼가 그대에게 헌정하노니,
‘세월이 가고 세월이 와도 / 나는 늘 당신이 그립습니다 / 남한강 푸른 물에 / 꽃잎처럼 스러져간 / 당신의 모습에 / 나는 늘 눈물이 납니다 / 세월이 무너져도 / 당신의 그 모습은 / 언제나 내 가슴에 / 못 잊을 그리움으로 남아 / 내 마음을 늘 시리게만 합니다.’ 중략,
이 가을 누가 내게 사랑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내 가슴헐어 네 빈 가슴 채워주는 보시(布施)라 말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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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승택 |
11-02-11 2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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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문 선생님, 당신의 그 뜨거운 가슴이 , 식지 않는 열정이 한 없이 부럽습니다. 오랫만에 만나본 글,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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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2-12 1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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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택 선생님,
뭐 보잘 것 있는 글이라고 먼곳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격려해주시니
고맙고 반가울 따름입니다.
마치 그 모습이 기별없이 찾아든 고우를 보고 버선발로 삽작밖에 이른
옛 선비의 우정어린 한시를 대하는 듯 합니다.
감사드리옵고 건강하신 몸으로 뵈올 날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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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1-02-12 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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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문선생님, 안녕하신지요.
선생님의 작품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퇴계선생의
또다른 일화를 알게 됩니다.
옛부터 기생과 학자, 문인의 정신세계는 통하는바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진옥기생과 송강이 그렇고, 홍랑과 최경창이 그렇고,
황진이와 서경덕이 그렇고, 매창과 유희경이 그렇고
자야(김영한)와 백석이 그렇고 두향과 퇴계가 그러한 것을 보며는.
이 아침 따뜻한 시정에 젖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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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2-12 1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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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선생님,
그간 두루 안녕하셨는지요.
선생님의 말씀처럼 선비의 그 멋과 풍류에 끌려 고전을 품어온 시간이 눈꼽만큼은 되었으나, 아직은 세상에 말하기가 부끄럽고, 두려울뿐입니다.
잘못된바, 모르는바가 있으면 언제라도 꾸짖어주시고 가르쳐 주신다면 큰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졸작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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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1-02-12 1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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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문 선생님! 오늘 한국수필작가회 문을 열어보니 매화향기 풍겨와서 봄을 맞이 하는 기분입니다. 지금 강릉에는 눈이 일미터가량 쌓여서 폭설대란이라는데 말입니다. 이별의 그 아픔을 그래도 낭만적으로 묘사한 시조가 아닌가 합니다. 저도 인사이동 때마다 그렇게 이별의 아픔을 달래곤 했었습니다. 이제는 정년 삼년이 넘었으니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요. 아무튼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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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2-12 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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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항상 안으로 품어 감싸주시고, 격려해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이별이란 것, 항시 겪으며 사는 일상이지만, 그것이 아름다울 수도 추할 수도 있는 것은
인연을 보낸 과정의 감정이 아니겠는지요.
항시 선생님은 아니 온 듯 오셔서 아니 간 듯 가시지만, 선생님의 체취는 이른 봄, 매향처럼
작가회의 글마당을 향기롭게합니다.
항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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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식 |
11-02-14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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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인들의 그리움과 경모, 풍류가 애틋하게 젖어옵니다,
'두향(杜香)'은 참으로 이쁜 이름입니다, 임병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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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2-15 1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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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선생님,
격려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건강하시옵고,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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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1-02-16 1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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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과 두향 이야기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서정적인 좋은 글로 대하니 애틋함에 가슴이 젖어듭니다.
어쩜 글이 달밤에 도란도란 속삭이며 흐르는 냇물처럼 아름답게 읽히는지요.
그 여운의 끝자락이 쉬 가시질 않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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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2-17 1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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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희 선생님,
바쁘신 중에도 글보아주시고, 옛 풍류에 젖어드심이
무구한 선생님의 감성을 뵙는 듯 합니다.
일찍이 사랑이란 이토록 지고지순한 것을,
이른 봄, 남녘의 매화가 그리워지네요.
선생님 항시 건강하시옵고, 올 한 해 눈부신 활동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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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1-02-19 0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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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만에 미문을 접하였습니다. 시에 얽힌 일화는 음악영화처럼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군요.
순수한 사랑은 시대를 초월하여 특히 작가에 의해 빛나는 모습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는군요. 좋은 글로 아침을 여는 오늘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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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2-20 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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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선생님,
졸작보아주시고 격려까지 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한시와 시조에 밝으신 선생님의 한마디는 저에게 큰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글이 선생님의 정취와 시정에 부합되었다니 더욱 그렇습니다.
항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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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인 |
11-03-13 18: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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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문 선생님 제목만 보고는 어느 여인일까? 몹시 궁금했습니다.
퇴계 선생과 두향의 애뜻한 사랑이야기, 저도 애뜻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옛 선인들의 풍류를 선생님 글로 인해 다시 좇아가 봅니다.
댓글이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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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1-03-14 1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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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인 선생님,
바쁘신 중에도 글 보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각박한 세상에 젖어보는 옛 선인들의 풍류, 그것은 진정 우리의 메마른 정서를
되찾아주는 봄나물의 향취같은 것이 아니겠는지요. 선생님, 항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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